2015-12-15

[Critique]<영화의 역사(들)>과 고다르의 서재


 2015년 3월부터 약 1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에 "<영화의 역사(들)>과 고다르의 서재"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했다. <영화의 역사(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된 텍스트들을 단서로 그의 서재를 상상해 보며 이러한 텍스트들이 고다르의 작업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풀어보려 했다. 연재 회수가 제한적인 점을 고려하여, 몽상이나 환상에 빠져드는 수인(囚人)의 모티브가 두드러진 세 편의 소설과 영화 및 예술의 역사에 접근하는 고다르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두 편의 에세이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재는 마무리되었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영화의 역사(들)>에 직접 인용되고 있거나 그와 관련된 다른 텍스트들에 대해서도 써 보고 싶다.  


차례


1.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 (제245호, 2015.3.24)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코울리지의 꽃」 (제247호, 2015.4.20)
3.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제249호)
4. 홀리스 프램튼의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 (제255호, 2015.10.26)
5. [최종회] 잭 런던의 『별 방랑자』와 샤를 보들레르의 「여행」 (제258호, 2015.12.6)



1.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 
(2015.3.24 /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제245호) * PDF로 보기




고다르가 자신의 책꽂이에서 꺼내든 한 권의 책이 내 시선을 끈다. 그는 꺼내든 책을 살며시 잡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 제목을 읽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꽂는다. 영과 무한(Le zero et l'infini). 이것은 헝가리 태생의 작가 아서 쾨슬러의 대표작 『한낮의 어둠』(1940)의 프랑스어판 제목이다. 20세기라는 영화의 시대를 영화 그 자체를 통해 반추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 <영화의 역사(들)>(1988~1998)에서 고다르가 읽거나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 유독 쾨슬러의 이 소설이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왜인가? 실은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다. 고다르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 책을 집어 들어 읽은 후 책꽂이에 완전히 밀어 넣지 않고 책등이 어중간하게 삐져나온 상태로 다시 꽂아두는 바람에, 그가 자신의 책꽂이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나올 때마다 자꾸만 그 삐져나온 책에 신경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의 작가가, 과학도였던 학부시절 선배의 소개로 읽게 된 기이한 과학서 『야누스: 혁명적 홀론이론』(1978)의 작가라는 점도 한몫했으리라. 

<영화의 역사(들)>의 맥락에서, 『한낮의 어둠』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고다르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영화의 영광과 힘의 증거로서 일련의 (소비에트 감독들의 영화에서 발췌한) 영상들을 보여주고 난 다음이다. 레닌의 죽음, 그리고 스탈린의 집권과 더불어 도래한 전체주의적 체제의 어둠에 대한 고발로서, 쾨슬러의 소설은 그에 뒤이어 고다르가 언급하는 또 다른 소설인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1973)와 나란히 같은 자리에 놓이는 것이다. 『한낮의 어둠』의 주인공인 루바쇼프는 한때 당의 유력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당의 ‘넘버 원’에 의해 숙청당하게 되는 인물로, 실제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니콜라이 부하린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낮의 어둠』과 <영화의 역사(들)>의 관계는 이처럼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쾨슬러의 이 소설은 <영화의 역사(들)> 전체의 주제는 물론이고 이 작품에서 고다르가 스스로를 한 명의 ‘소설적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르기까지 보다 심원한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한낮의 어둠』의 상당 부분이 감옥에 갇힌 루바쇼프가 자신의 지난 세월을 반추하면서 왜 옳은 동기가 파국적 결과를 낳았는지, 자신 또한 그러한 파국에 책임이 있는 것인지를 치열하게 따져 묻는 사색적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취조의 과정을 묘사한 부분들조차도 루바쇼프가 자기 안의 다른 자기와 펼치는 내적 대화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역사가 내게 대출해 준 신용을 모두 탕진해 버렸다. 내가 옳았다면 후회할 것이 없고, 틀렸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어떤 역사인가? 역사의 판단은 언제 도래하는가? 그것은 언제나 늦게, 그것도 가장 늦게 도래하는 것이다. “역사는 하소연하는 이들의 턱뼈가 먼지가 될 즈음에야 판결을 내렸다.” 루바쇼프와 고다르는 자신들이 역사에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공산주의의 실현, 영화의 누벨바그)이 도래하게끔 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역사에 도래했던 마지막 국면 - 더 이상 그 이후의 국면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앞선 것들의 쇠락만을 지켜보게 만드는 저주받은 유토피아 - 의 조종(弔鐘)을 울리기 위해 호출된 자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세대에 속한다. 그들의 뒤를 잇는 세대에 대한 (고다르도 동의할 법한) 쾨슬러의 묘사는 서늘하면서도 냉철하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영화의 역사(들)>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주요한 서사적 모티브가 있다면, 하나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의 시와 오르페우스 신화 및 보들레르의 「여행」과 「여행으로의 초대」 등을 넘나드는 여행의 모티브이고, 다른 하나는 포로시절 사영기하학의 원리를 고안한 장-빅토르 퐁슬레, 생애 말년 호텔 방에 처박힌 채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만을 거듭 보았다는 하워드 휴즈, 수감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상의 여행에 빠져드는 잭 런던의 『별 방랑자』(1915)의 주인공 대럴 스탠딩 등으로 예시되는 몽상, 환상, 사색에 빠져드는 수인(囚人)의 모티브이다. 다만 (감옥이나 호텔이 아닌)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힌 고다르가 수행하는 정신적 여행은 퐁슬레적인 순수 지식에 대한 탐구, 휴즈적인 자폐적 침잠, 별 방랑자의 환상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이러한 수인들 가운데 특별히 루바쇼프라는 인물이 <영화의 역사(들)>의 고다르라는 ‘주인공-인물’의 숨은 모델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갇힌 공간에서 그가 수행하는 정신적 여행의 역사적 성격, 그리고 집요한 내성적(內省的) 성격 때문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꿈꾸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그 꿈이 어떻게 역사적 사유와 맞닿을 수 있는가? <영화의 역사(들)>은 보르헤스가 「코울리지의 꽃」(1952)에서 인용한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의 텍스트를 재인용하는 고다르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꿈속에서 낙원을 여행한 한 남자가 그곳에 왔었다는 증거로 한 송이의 꽃을 받았다면, 그런데 깨어 보니 손에 그 꽃이 들려 있었다면, 어찌 된 것이겠는가? 내가 바로 그 남자였다.” 보르헤스가 코울리지의 꽃으로 상징화하고 있는 예술적 보편사(史)의 정신(Espíritu)을 건네받은 이는 끊임없이 꿈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각성 상태에서 꾸는 꿈이다.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은 악몽으로 화한 정치적 유토피아의 꿈에 대한 역사적 비판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치열하게 내성적인 백일몽을 통해 역사적 비판에 임하는 수인의 형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역사(들)>을 위한 서재의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낮의 어둠』 한국어판은 최승자 시인의 번역으로 1981년 한길사에서 출간되었고, 문광훈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2010년 후마니타스에서 출간되었다.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코울리지의 꽃」
(2015.4.20 /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제247호)




[사진 1]


1953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35편의 짧은 에세이들을 모은 『다른 심문들』(Otras Inquisiciones)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발표한다. 이 산문집에 실린 글 가운데 「코울리지의 꽃」은 1952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기서 보르헤스는 일종의 문학적 범신론,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단 하나의 비인칭적 저자에게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 즉 ‘무한한 문학’(infinite literature)의 보편성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폴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문학의 역사는 작가들의 역사도, 작가들의 생애나 작품의 전개 과정 속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역사도 아니며, 문학의 생산자 혹은 소비자로서의 정신(Espíritu)의 역사이다. [정신이라고 하는] 유일무이한 그 단 하나의 작가를 논하지 않고는 문학의 역사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후 그는 상이한 실재들(꿈과 현실, 현재와 미래, 과거와 현재 등) 간의 교통이라고 하는 모티프를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세 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차례로 소개하는데, 이 가운데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의 (생전에 미발표된) 유명한 텍스트야말로 보르헤스의 이 에세이에 가장 커다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낙원을 여행한 한 남자가 그곳에 왔었다는 증거로 한 송이의 꽃을 받았다면, 그런데 깨어 보니 손에 그 꽃이 들려 있었다면, 어찌 된 것이겠는가?”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을 마무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코울리지의 이 텍스트이다. 흥미로운 것은 고다르 자신이 이 텍스트를 읊조리는 동안 (정작 보르헤스가 ‘직접’ 쓴 텍스트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굳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새겨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코울리지를 보르헤스를 통해 ‘재인용’하고 있음을 명시하기 위해서일까? 그보다는 내레이션과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그 둘 모두를 이중적으로 가리키려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 꽃은 전수되는 꽃, 넘겨받고 넘겨주는 꽃이다. 그런 점에서 유일무이한 꽃이며 무한한 이름들을 품고 있는 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이름들’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비인칭적] 작가’의 행위로 ‘정신의 역사’를 사고하고자 하는 발레리의 기획, 나아가 이를 확장한 보르헤스적 상호텍스트성의 기획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영화의 역사(들)>이 영화사의 걸작들, 주요 감독들, 작품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편년사적 기술이 아니라, 에우리디케를 (되)찾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이라는 신화적 모티브를 바탕에 두고 상호텍스트적 인용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직조하는 ‘영화적 정신’의 작업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라. <영화의 역사(들)>이 예술적 보편사의 기획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이 작업의 총론에 해당하는 1A파트의 부제가 “모든 역사들”(toute les histoires)이라는 데서도 감지된다. 그런가 하면 인용의 콜라주로 19세기를 재구성하고자 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발터 벤야민이나 숱한 도상(그림, 사진 등)들의 배치 속에서 고대로부터 유럽 문명을 가로지른 ‘순수비이성’의 존재를 감지하고자 했던 <므네모시네>의 아비 바르부르크 등도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영화의 역사(들)>에서 이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혹은 그 기획의 유사성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비교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은 고다르라는 한 인물에게 건네진 꽃, 하지만 누구에게 (다시) 건네주어야 할 지 몰라 거듭해서 그걸 건네받은 꿈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고독한(seul) 인물의 꽃이다. 그런 점에서 유일무이한(seul) 꽃이며 단 하나의 이름을 품고 있는 꽃이기도 하다. 이는 1A파트에 이어지는 1B파트의 부제를 “고독한/유일무이한 역사”(une histoire seule)로 삼고 불현듯 스스로를 역사의 특이점에 자리한 존재로서 호명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역사(들)>은 고다르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작품의 종결부에서 코울리지의 텍스트가 낭독되는 동안 화면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꿈의 공장’(usine de rêve)이라는 글자와 더불어 나타나는 노란 꽃(다시 강조하건대 이 꽃은 그가 거듭해서 꿈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저 사진으로만 접했던 고흐의 자화상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유일무이한 고독의 낙원을 거니는 얼굴 없는 예술가의 모습을 담은 <반 고흐의 초상을 위한 습작>(1957) 그리고 고다르 자신의 초상사진이다. (이상 사진 1 참조) 코울리지의 텍스트를 모두 읊조리고 난 고다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베이컨의 그림과 자신의 초상사진을 겹쳐놓은 후, 예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내가 바로 그 남자였다.” 이 순간, 발레리(와 보르헤스)가 떠올렸던 ‘정신의 역사’의 작가는 고다르에 의해 비인칭적(impersonal)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personal) 존재라는 이중의 의미를 띄게 된다.




[사진 2]


[사진 3]


<영화의 역사(들)>을 두 번째 보던 때부터, 처음 보았을 때는 지나쳤던 도입부의 한 짧은 영상이 문득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영상은 이 작품의 결말부 코울리지의 텍스트 및 노란 꽃의 이미지와 수미상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1A파트의 도입부에 삽입된, 피아노 위에 한 송이 꽃을 올려둔 뒤 열심히 건반을 두드리는 채플린의 모습이 담긴 영상(사진 2)으로, 이것이 케빈 브라운로우와 데이빗 길의 다큐멘터리 <미지의 채플린>(1983)에서 발췌한 것임을 알게 된 건 꽤 나중의 일이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채플린의 모습은 서재에 앉아 전동타자기를 두드리는 고다르의 모습과 병치된다.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에서 활동하며 꽃을 건네받았던(사진 3의 <시티 라이트>) 이와, 건네받은 꽃을 어디 전해야 할 지 모르는 데다 꽃 자체를 ‘꿈의 공장’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의 대조. (이 순간 고다르가 내뱉는 말은 “게임의 규칙”이다.) 어쩌면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꿈속에서 거닐었던 곳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 저승이며 거기서 건네받은 꽃을 시들지 않은 채로 이곳에서 간직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힘들거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일까? 고다르가 저승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향한 엄준한 경고의 말 ― “hoc opus hic labor est.”(이것이 문제고 이것이 힘든 일이라오.) ― 을 작품의 맨 첫머리에 두고 있는 것은? (라틴어로 쓰여진 이 말은 한국에서 <영화의 역사(들)>이 상영될 때마다 번역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사진 4 참조.) 이 인용구의 출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제6권으로, 그 앞에 놓인 말들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옥의 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으니 내려가는 일은 쉽다오. 하지만 발걸음을 돌려 위쪽 세상의 대기로 돌아오는 일, 이것이 문제고 이것이 힘든 일이라오.”  



 [사진 4]


※ 『다른 심문들』의 한국어판은 정경원 교수의 번역으로 2008년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만리장성과 책들』이다.  





3.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제249호)



[사진 1]


<영화의 역사(들)>은 20세기의 예술로 일컬어지는 영화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그 영광을 노래하기보다는 오욕, 타락 그리고 실패의 역사를 말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정작 예술이 되는 데 실패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fatale beauté)”이라는 부제가 붙은, <영화의 역사(들)>의 2B파트에서 고다르는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는 상품이 되었으니 우린 그걸 태워버려야 한다고, 나는 앙리 랑글루아에게 말했었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어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하라. 내면의 불(le feu intérieur)을 통해 [태워야 한다]. 예술이란 불과 같아서 그것이 태워버린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그가 이렇게 읊조리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서재에서 이런저런 책을 꺼내 보는 고다르의 모습, <주말>(1967)의 불타는 자동차들, 그리고 화면 위에 떠오르는 “막이 오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꿈을 버린다.”라는 텍스트이다. (사진 1 참조) (불)가능한 희망을 위해 모든 것을 부정하기, 탄생을 위한 적멸(寂滅), 역설적이기 짝이 없는 (반)행위를 문명이 부과한 의무를 철저히 수행하지 못한 예술에 허락된 유일한 몸짓으로 취하는 것, 시대착오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이러한 예술적 영웅주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헤르만 브로흐, 토마스 만, 로베르트 무질 등의 독일어권 작가들 - 모두 <영화의 역사(들)>에서 직접적으로 언급 내지는 인용되고 있는 작가들이다. - 이 고다르와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도록 권유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오스트리아 작가 헤르만 브로흐의 모더니즘 소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50분 분량의 비디오 에세이 <소프트 앤 하드(Soft and Hard)>(1985)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이후 <영화의 역사(들)>에 이르러서는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 대부분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텍스트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트로이 전쟁 이후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 아이네아스가 (로마인들이 로마의 전신이라고 간주했던 도시인) 라비니움을 세우기까지의 모험을 기술한 미완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 베르길리우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브로흐가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베르길리우스 생애의 마지막 이틀이다. 그리스로부터의 오랜 배 여행 끝에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그는, 미완의 『아이네이스』가 진정한 인식에 닿지 못한 채 아름다움이라는 가상의 주위만을 겉돌았을 뿐이라는 판단 아래, 자신이 죽기 전 모든 원고를 태워버리고자 한다. 이때 열병의 환각에 사로잡힌 그가 침상에 누운 채 펼치는 치열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한 내성(內省)의 과정 -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본지 제245호에 실린 연재글 참조)의 주인공 루바쇼프의 그것을 능가하는 - 을 거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적 만연체로 서술한 2부는 이 소설의 백미다. ‘물-도착’, ‘불-하강’, ‘흙-기대’, ‘공기-귀향’의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에서, <소프트 앤 하드>와 <영화의 역사(들)>의 고다르가 거듭 인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2부에서 발췌한 텍스트들이다.


<영화의 역사(들)> 2B파트의 중반부에서, 고다르는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발췌한 장문의 텍스트를 여배우 사빈느 아제마가 흡사 화면 밖의 누군가를 향해 발화하듯 담담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낭독하는 모습을 거의 6분 가까이 보여준다. (사진 2 참조) 발췌한 텍스트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브로흐의 원작 이곳저곳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원래의 순서와 달리 배열, 혹은 몽타주함으로써 슬며시 의미를 굴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참조) 재구성된 브로흐의 텍스트는 20세기의 영화가 엄연한 죽음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 영화란 기원이 되는 대상을 상징적으로 ‘죽이고’ 대체하는 사진적 이미지에 기초해 탄생했으며, 또한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에 적시에 응답하지 못했기에 이후의 영화는 ‘뒤늦음’(belatedness)의 감각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고다르적 서사 -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빚어진 이미지의 타락,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라는 2B파트의 주제를, 대단히 농밀한 시적 언어를 통해 함축적으로 제시해 준다. “가까이에 숨은 아득함, 먼 곳을 넘는 아득함, 양자의 바깥과 안의 한계에 가로놓인 경계, 양자의 현실 속에 있는 비현실, 양자 속에 환기된 유혹 - 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 아름다움은 마령(魔靈) 같은 힘으로 모든 것을 수렴한다. […] 아름다움이란 바로 유희 그 자체 […] 아름다움에의 도피, 도피의 유희.”



[사진 2]


고다르의 작업과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사이의 공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역사(들)> 전편을 가로지르는 몽상, 환상, 사색에 빠져드는 수인(囚人)의 모티브는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며 병상에 누워 있는 그는 로마의 영광을 위해 『아이네이스』의 완성을 탐하는 아우구스투스황제에 의해 상징적으로 속박된 존재이다)는 물론이고 브로흐 자신(이 소설의 일부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집필되었다)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 강대한 문명(로마제국)이 탄생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정작 문명의 한계와 종언에의 예감을 펼쳐낸 이 소설이, 의미심장하게도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에 간행되었다는 점도 고다르는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우리디케를 되찾으려 저승으로 ‘하강’한 오르페우스의 여정을 나락에 떨어진 예술의 구원의 우화로 다시 취하는 <영화의 역사(들)>의 서사적 흐름은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거의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정도다. (“에우리디케를 찾아서 저승으로 내려가려 했을 때 오르페우스가 구하고 있던 것이 다름 아닌 이 [아름다운 언어의 싸늘한 표층 밑에 있는] 언어가 아니었던가?”) 『아이네이스』제6권에 등장하는 경고의 말(“지옥의 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으니 내려가는 일은 쉽다오. 하지만 발걸음을 돌려 위쪽 세상의 대기로 돌아오는 일, 이것이 문제고 이것이 힘든 일이라오.”)에 예술의 구원과 결부된 의미를 더한 것은 바로 브로흐이며, 고다르가 “이것이 문제고 이것이 힘든 일이라오.(hoc opus hic labor est)”라는 인용구를 <영화의 역사(들)>의 첫머리에 두기로 결정했을 때, 그 또한 분명 ‘오푸스(opus)’라는 라틴어가 ‘과업’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중의 뜻으로 읽힐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고다르가 직접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미지에 대한 브로흐-베르길리우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큰 지침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활이란 이미지의 축복과 이미지의 저주 아래 영위되는 것이다. 다만 이미지에 의해서만, 인생은 스스로를 파악할 수가 있다. 이미지를 추방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집단생활이 시작된 이후 인간 속에 숨어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 선행하며 그보다 강력하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며 과거와 미래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이중의 꿈-기억이며 우리 자신보다도 강대하다.” 


※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의 한국어판은 김주연, 신혜양 교수의 번역으로 2012년 시공사에서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영화의 역사(들)> 2B파트에서 사빈느 아제마가 낭독하는 부분을 아래 정리해 보았다. 그녀가 낭독하는 순서대로 정리했으며 숫자는 한국어판 1권의 쪽수와 행을 뜻한다. (발췌는 모두 1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2권에서는 발췌된 부분이 없다.) 295:18~296:2 / 167:8~167:24 / 168:22~169:4 / 298:17~299:5 / 173:17~173:22 / 174:4~174:9 / 91:7~91:12 총 일곱 군데에서 발췌되었으며 마지막 부분만이 1부에서 발췌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2부에서 발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을 인용할 때는 가급적 한국어판 번역을 따랐으나 일부 수정하거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도 했다.     





4. 홀리스 프램튼의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
(2015.10.26 /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제255호)



[사진 1] 홀리스 프램튼의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가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게재된 『트라픽』 제21호(1997년 봄호) 표지. 


<영화의 역사(들)> 프로젝트의 막바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고다르는 영화잡지 『트라픽 Trafic』 제21호(1997년 봄호. 사진 1)에 실린 한 편의 에세이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미국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 홀리스 프램튼이 1971년 9월에 『아트포럼 Artforum』 지에 발표한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소개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다르는 프램튼의 영화작업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심지어 그가 1984년에 이미 세상을 떴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고다르는 무엇보다 그 에세이 자체의 웅변적인 힘에 끌렸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인데, 영화사적 사실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닌 영화의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묻는 ‘메타역사’(metahistory)의 방법론에 대한 프램튼의 생각은 <영화의 역사(들)>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된 고다르의 동기와 강렬하게 공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거의 그대로 고다르가 썼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1830년대에 게오르크 뷔히너는 <보이체크>를 썼다. 정치적 살인의 희생자가 된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죽기 전 한 친구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군론(group theory) 혹은 수학의 메타역사의 기초가 담겨 있었다. 탈봇과 니엡스는 사진을 발명했다. 벨기에의 물리학자 플라토는 최초의 진정한 영화라 할 페타키스토스코프를 발명했다. 영화사에서 이러한 네 가지 사실들은 아마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이다. 영화의 메타역사에서 이러한 네 가지 사건들은 결정적으로 관련될 수 있다.”


1997년 5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는 <영화의 역사(들)>의 3A 및 4A파트가 최종본에 가까운 형태로 상영되었는데, 이때 고다르는 『트라픽』 21호에 게재되었던 두 편의 글(홀리스 프램튼과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의 에세이)만을 따로 묶어 특별판을 제작해 줄 것을 잡지사 측에 요청했다. 프램튼과 로젠봄의 글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함께 수록된 “<영화의 역사(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46페이지짜리 『트라픽』 특별판(사진 2)은 당시 칸영화제에 참석한 취재진들에게 배포되었다. 이로써 고다르는 프램튼의 에세이가 <영화의 역사(들)> 프로젝트와 공명하는 특권적 텍스트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사진 2] 고다르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어 1997년 칸영화제에서 배포된 『트라픽』 특별판 표지.


이듬해인 1998년, <영화의 역사(들)> 프로젝트의 대미를 장식하는 4B파트를 마무리하면서 고다르는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에서 발췌해 다소 수정, 변형한 문장들을 낭독하는 내레이션을 작품 후반부에 삽입한다. 루이 푀이야드의 <방데미에르>(1918), 니콜라스 레이의 <에버글레이즈에 부는 바람>(1958) 그리고 존 카사베테스의 <얼굴들>(1968)에서 발췌한 영상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다르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사진 3) “하나의 세기가 서서히 다음 세기로 녹아들어갈 때, 어떤 이들은 기존의 생존 수단을 [흡수해] 새로운 생존 수단으로 변형시킨다. 후자의 것[그러한 변형을 통해 얻어진 새로운 생존 수단]을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어떤 시대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것, 그것은 그 시대가 창조해 낸 예술형식이다. 어떤 활동이 예술이 되는 것은 그것에 부합하는 시대가 끝난 다음이다. 그 후에, 이 예술은 사라지리라.” 




[사진 3] <영화의 역사(들)>에서 프램튼의 에세이가 인용되고 있는 부분에 등장하는 영상들.   


사실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는 프램튼의 생애 후반기를 사로잡은 <마젤란> 연작 프로젝트를 위한 개념적 초안 내지는 선언문으로 간주되곤 하는 텍스트다. 프램튼은 이 에세이를 발표하고 나서 이듬해(1972년)부터 <마젤란> 연작의 제작에 착수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4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프램튼에 따르면 영화란 기계의 시대(Age of Machine)에 태어나 그 시대가 저문 이후에도 살아남은 대표적인 형식 혹은 ‘최후의 기계’로서, 여기서 기계란 그것이 작동하는 물리적 원리가 직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화를 낳은 기계의 시대는 레이더처럼 그 물리적 작동원리가 직관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매체가 등장함에 따라 막을 내리는데, 바로 이 쇠퇴의 시점부터 영화는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메타역사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때 운동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시네마’라는 용어는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기계의 특권적 요소라 할 수 있는 필름의 ‘구조적 원리’ 안에는 그러한 운동의 가정을 정당화하는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세상의 모든 필름, 모든 영사기, 모든 카메라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매 순간 끊임없이 팽창하는 잠재적이고 메타적인 장치로서의 ‘무한영화’(infinite film)를 상정한 뒤, 그러한 무한영화와 구조적으로 상응하는 한 편의 영화, 즉 “기계적인 명연주자라 할 영사기”를 위한 ‘악보’로서의 ‘필름’을 실제로 구성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숙고해 본다. 


고다르가 프램튼의 에세이를 수용하는 것은 <영화의 역사(들)>에 직접 인용된 “어떤 활동이 예술이 되는 것은 그것에 부합하는 시대가 끝난 다음”이라고 하는 통찰에만 국한된 것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한영화’의 개념이나 이의 실행과 관련된 생각은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경험으로서의 영화사」라는 글에서 크리스타 블륌링거가 지적한 대로, 필름을 통해 필름의 메타역사를 구성한다고 하는 프램튼의 기획은 (그가 사망한 해에 발표된) 모건 피셔의 <스탠더드 게이지>(1984) 같은 작품에서 보다 뚜렷이 형상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인디아>(1959)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리만과 플랑크의 이론이 고전적 기하학과 물리학을 포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영화를 포괄하고 있다”고 쓰기도 했던 청년 비평가 시절의 고다르를 떠올린다면, 메타역사적 사유를 위한 도구로서의 무한영화라는 개념이 전적으로 그와 무관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추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필름의 메타역사가로서 스스로를 규정한 프램튼이 <마젤란> 연작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고다르는 영화를 낳은 기계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매체라고 흔히 언급되는 비디오(와 텔레비전)의 영화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선 시대에 종언을 고한 매체를 통해 그 시대가 낳은 최후의 산물을 고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뉴미디어의 기수가 되는 일 따위는 고다르의 안중에 없었겠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과거의 영화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야흐로 예술이 되어가고 있는 영화를 위해 프램튼 식의 미학적 모험을 감수한다고 하는 것도 석연치 않은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프램튼의 텍스트를 읊조리던 고다르가 원문에는 없는 “그 후에, 이 예술은 사라지리라”라는 말을 굳이 덧붙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세르주 다네는 이를 ‘고다르의 패러독스’라 불렀는데, 그에 따르면 고다르는 “얼마 전의 과거와 가까운 미래 사이에 붙들려” 있고 “자신이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과 아직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 “현재에 있도록 저주받은 자”이다. 시네마라고도 비디오라고도 할 수 없는 <영화의 역사(들)>의 독특한 위치, 거기 감돌고 있는 신중한 미학적 보수주의, 20세기의 역사(특히 2차 대전과 아우슈비츠)와 영화의 길항관계에 대한 예민한 윤리적 감각, 이로 인해 고다르는 프램튼의 급진적 아방가디즘의 문턱에서 돌아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필름의 메타역사를 위하여」는 홀리스 프램튼의 글 모음집인 『On the Camera Arts and Consecutive Matters: The Writings of Hollis Frampton』(edited by Bruce Jenkins)에 수록되어 있다. 프램튼의 주요 영화작업은 2012년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한 블루레이 <A Hollis Frampton Odyssey>를 통해 볼 수 있다.





5. 잭 런던의 『별 방랑자』와 샤를 보들레르의 「여행」
(2015.12.6 /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제258호)



2014년에 발표된 고다르의 3D 장편영화 <언어와의 작별>의 결말부, 우리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록시라는 이름의 개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고다르 자신과 그의 동반자 안느-마리 미에빌로 추정되는) 두 남녀의 대화가 보이스오버로 들려온다. “그녀는 마르키즈 제도에 대한 꿈을 꾸고 있어.”라는 여자의 말에 뒤이어 남자는 “잭 런던의 소설에서처럼 말이지.”라고 덧붙인다. 우리는 <영화의 역사(들)> 전편을 가로지르던 상상적 여행이라는 모티브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들의 대화는 20세기 초 자신의 범선을 타고 마르키즈 제도를 비롯한 남태평양 일대를 여행한 후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던 작가에 대한 언급이면서, 구속복을 입은 채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 온전히 정신의 힘으로 인류 역사를 가로지르며 각종 모험을 겪는 과정을 그린 소설 『별 방랑자』에 대한 언급이기도 할 것이다. 


잭 런던이 『별 방랑자』를 발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인 1915년이다. (그는 이 소설이 출간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직 대학교수였으나 살인죄로 복역 중인 대럴 스탠딩이라는 인물로, 그는 교도소장이 가하는 모진 구속복 고문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던 중 전생(前生)의 여러 시대를 넘나드는 정신적 여행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 연재글을 계속해서 읽어온 이들이라면 이 인물이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의 루바쇼프(본지 제245호), 그리고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의 베르길리우스(본지 제249호)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육신이 갇힌 공간(감옥이나 침상)에서 치열하고도 집요하게 과거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영화적 정신’의 형상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형상이 자신의 스위스 자택 작업실에서 이런저런 영화들을 불러내며 20세기라는 영화의 시대를 반추하는 고다르의 자화상과 고스란히 겹치고 있음도 알 것이다. 심지어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 1B파트에서 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1954)와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를 겹쳐 놓은 ‒ 여행하는 자와 이미지를 불러내는 자의 중첩 ‒ 화면 위로 나직하게 “별 방랑자”(le vagabond des étoiles)라 중얼거리며 직접적으로 잭 런던의 주인공을 호명하고 있기까지 하다. (사진 1)




[사진 1] <영화의 역사(들)> 1B파트에서 잭 런던의 소설 제목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


그런데 임박한 죽음을 감지한 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정신의 모험이란 바로 그 죽음을 향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내던지는’(投) 작업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내던짐’은 1970년대 이후 고다르 스스로가 감행한 작업, 영화의 임박한 죽음에 맞서 오히려 그러한 죽음을 초래한 뉴미디어(텔레비전과 디지털)로 대담하게 투신(하여 저항)하는 작업과도 관련될 수 있겠지만, <영화의 역사(들)>에서 ‘내던짐’은 무엇보다 투사(投射)/영사(projection)라고 하는 영화장치의 오래된 기제의 역량과 관련되어 있다. 고다르는 우리를 향해 빛을 발하는 텔레비전은 보는 이를 밀쳐내지만 우리 등 뒤에서 투사/영사되는 빛을 통해 성립되는 영화는 보는 이를 끌어당긴다고 말한다. “오직 영화만이”(seul le cinéma)라는 부제가 붙은 2A파트에서, 고다르는 투사/영사란 죽음을 향해 투신을 감행하는 오르페우스적 여정을 촉발하는 기제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영화는 [오직 영화만이!]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도 죽지 않게끔 해 준다.”(사진 2)는 그 유명한 구원의 약속과 더불어 말이다. 나는 <영화의 역사(들)> 시리즈 전편에 걸쳐 가장 감동적이라 할 ‒ 또한 ‘고다르적 (억지) 논리’의 정수를 보여주는 ‒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본 연재를 마무리하고 싶다.




[사진 2] “영화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도 죽지 않게끔 해 준다.”


2A파트에는 고다르가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와 나눈 대담을 기록한 비디오 영상클립이 꽤 길게 삽입되어 있다. 어느 순간 고다르는 “내게 있어 거대한 역사란 바로 영화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보다 큰 역사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투사/영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과 더불어 투신(投身)의 모티브와 연관된 일련의 이미지들이 차례로 제시되더니 마지막 이미지 위에 “오직 영화만이”라는 텍스트가 떠오른다. (사진 3) 잠시 후 고다르는 우리에게 나폴레옹 군대에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뒤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사영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의 원리를 고안한 장-빅토르 퐁슬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로써 수인의 정신적 여행으로서의 영화를 위한 개념적 원리가 제시된다. 이윽고 영사기(projector)가 돌아가고 여행이 시작된다. (사진 4) 그리고 우리는 여배우 줄리 델피의 얼굴 위로 터너의 회화 <평온: 바다에서의 매장>(1842)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사진 5), 잠시 후 그녀는 보들레르의 시 「여행」을 천천히 낭독하기 시작한다. 여러 이미지와 사운드가 떠오르는 가운데 그녀의 낭독은 시 전문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 13분 가까이 이어진다.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아이에겐 / 우주가 그의 엄청난 식욕과 같은 것 / 아! 등불 아래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큰가! / 추억의 눈으로 본 세계는 그토록 작은데!” 그녀의 낭독과 더불어, 살인자를 피해 보트를 타고 달아나는 두 아이의 모습이 담긴 <사냥꾼의 밤>(1955) 발췌영상이 길게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여기서 고다르는 자신의 방식대로 보들레르를 거슬러 읽으면서(혹은 오독하면서), “추억의 눈으로” (이미 경험한) 세계를 (돌이켜) 보는 이들이 아니라, 등불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미지의 세계에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추억 없는 이들, 즉 아이들을 ‘영화적 정신’의 형상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영화의 역사(들)>에는 영화사(史)의 온갖 이미지들이 인용되고 있지만 종종 이것들은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단순한 시각적 정보(달리는 남자, 춤추는 커플 등)만을 지닌 이미지로 환원되어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되곤 한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죽음으로 투신한 뒤에 부활한 이미지들, 뒤돌아본 오르페우스가 되찾은 에우리디케의 조각들이다. 고다르의 과격함은 세계의 이미지들을 추억 없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영화적 정신’의 형상을 급기야 <언어와의 작별>에 등장하는 록시라는 이름의 개로까지 밀고 나가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니 잭 런던은 『별 방랑자』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기억이란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의 그릇된 정의 속에는 단순한 진실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은 제정신을 뜻한다.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은 집착이자 정신이상이다.” 물론 이 망각의 작업은 “우리가 어린 시절 지니고 있던 [이 세계에서 경험한 적이 없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 시인 워즈워스가 “영광의 나부끼는 구름”이라 표현한 그러한 기억, 고다르 식으로 말하자면 비인칭적인 “거대한 역사”에 해당할 법한 그러한 기억을 위한 미지로의 투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보들레르의 「여행」은 다음과 같은 (줄리 델피의 낭독에서는 빠져 있는) 문장들로 끝난다. “지옥이건 천국이건 아무려면 어떠랴? 심연 깊숙이 / 미지의 바닥에 잠기리라,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사진 3] <영화의 역사(들)> 2A파트에 등장하는 투신(投身)의 이미지들.



[사진 4] 투사/영사, 그리고 여행의 시작.



[사진 5] 보들레르의 「여행」을 낭독하는 줄리 델피
   

※ 잭 런던의 『별 방랑자』 한국어판은 이성은의 번역으로 2010년 궁리출판에서 출간되었다. 보들레르의 「여행」이 수록된 『악의 꽃』 한국어판은 윤영애의 번역으로 200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본문의 인용은 한국어판을 따랐다.

  

2015-09-01

[Martian Chronicles] 2015년 9월 첫째 주


앤서니 맥콜의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 Notes in Duration」(1975)


※ 올해 서울국제실험영화제(EXiS, 2015.8.20~8.27)는 영화제 기간 동안 「카운터-프로덕션 Counter-Production」이란 주제 하에 시청각갤러리에서 전시, 강연, 퍼포먼스 등을 진행했다. (전시 팸플릿은 이곳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전시 작품 가운데는 앤서니 맥콜(Anthony McCall)의 1975년 설치작품 <앰비언트 라이트를 위한 영화 Long Film for Ambient Light>(1975)가 포함되어 있었다. 


앤서니 맥콜이 촬영한 전시장 사진
(1975년 6월 19일 오전 3시. 뉴욕의 Idea Warehouse)


맥콜이 직접 작성한 작품 설명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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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도 영사기도 사용하지 않는 작품. 세 가지 요소가 모여 이 '영화'를 구성하는데 이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선행하지 않는다. 

(1) 벽에 붙은 시간표. 총 50일 치. 실제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기간은 시간표 한가운데 표시되어 있다. [ 원래 이 작품은 1975년 6월 18일 정오부터 다음 날 정오까지 24시간 동안 전시되었다.]
(2) 변형된 공간.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전구 하나가 눈높이에 매달려 있다. 창문들은 모두 하얀 종이로 덮여 있는데 이로써 주간에는 광원 역할을 하고 야간에는 반사면(즉, 스크린) 역할을 하게 된다.
(3) 벽에 붙은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라는 제목의 2페이지짜리 스테이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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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각갤러리 전시를 위해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 전문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를 아래 옮겨 둔다. 



지속시간에 대한 노트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영화는 동적인 작품처럼 여겨지는 것과 정적인 환경처럼 여겨지는 것 사이의 문턱에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다. 형식주의적 예술 비평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이 두 가지 상태를 구분하려 해 왔는데, 이러한 분리는 내겐 부조리하게 여겨진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생각이라고 하는 (전기화학적) 과정 또한 물론이거니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지성이 연속적 시간에 대한 지각을 굳이 ‘순간들’로 분리해 분석하게끔 된 것은 문화적[으로 얻어진] 습성이다. 연속적이고, 중층적이며, 다중적인 지속보다는 정적이고, 절대적인 경험의 덩어리들을 고수하려 드는 것은 편리할지는 모르나 분명 왜곡된 인식의 태도다.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는 시간 동안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예술을 ‘대상’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는 시간 동안 변화를 보여주는 예술을 ‘사건’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는 예술을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사실은, 본질적으로 연속적인 시간에 기반을 둔 것들이 절단되고 구분되는 것은 바로 우리를 통해서라는 점이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벽에 붙은 한 장의 종이는 영화 상영과 마찬가지로 지속[되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 우리의 지각들과 맺는 즉각적인 관계에 있다. 

두뇌에 가해지는 자극의 측면에서 보면, 정적인 것이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이] 반복되는 사건이다. 숙고가 행해지는 장소가 ‘정적’이건 ‘동적’이건 간에, 우리는 예술 행위라는 맥락 속에서 주의집중의 시간을, 인지와 기억의 과업을 처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대상이나 사건에 [직접] 다가갈 수 없다. 그것들은 좀처럼 ‘과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의도된, 의미를 품은 기호이기 때문에 이[처럼 ‘과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일단 하나의 관념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것은 (예술적) 관념들의 회로에 들어가 그 회로 내에서 톺아볼 수 있게 될 뿐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는다. 정적이건 동적이건 어떤 예술작품의 파악은 다른 모든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잠깐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남은 것이다. 영화 상영과 관련된 규준들 가운데 하나는 ‘제한적으로, 무리지어 보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간에 모이는 것이, 그럼으로써 ‘관객’이라 불리는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집단에는 특수한 행동 특성이 있다.   
  
<화재 주기 Fire Cycle>(1974)와 <네 대의 영사기를 위한 긴 영화 Long Film for Four Projectors>(1974)를 통해, 나는 작품의 지속시간을 늘리는 것이 관객에게 가능한 집중의 성격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알고 만족했다. [통상적인 영화와는 달리 작품을 보기 위해] 주의집중을 해야 하는 시간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작품의 감상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 지는 그저 [관람객 각자에게] ‘열려’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에 따라 오고 갔다. 계속해서 바뀌기는 했어도 작품 각각의 구조에는 체계적인 균등성이 있었다. 특정한 위치에서 감상해야 한다는 지시도 없었고, 두 작품 모두 특별히 주의집중의 축이 생기지 않게끔 전체 [전시]공간을 활용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두 편의 작품은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1973) 같은 나의 전작들과 다르다. <원뿔을 그리는 선>의 경우에도 관람을 위한 위치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방향의 축이 있었다. [관람객들의] 눈의 방향은 결국 언제나 한 곳으로, 즉 영사기의 렌즈로 향했던 것이다.) 어떤 순간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에도 [전시공간의] 규모는 그들을 공간적으로 분리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으로 인해 관람객과 작품 간에 일대일의 관계 성립이 가능해졌다.

이제 나는 다른 기본적인 것들, 즉 시간성과 빛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작품에서] ‘공연적’ 측면을 줄여나가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나는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쓰이는 (비싸고 느리다는 점에서 불리한) 사진화학적, 전기역학적 과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나는 청개구리 같은 짓거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제1원리’ 뒤에는 다른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고, 내가 [통상적인 방식으로] ‘영화들’을 만드는 일을 계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영화]제작의 물리적 과정보다는 예술적 행위로서의 영화 뒤에 숨은 가정들에 천착하려 한다. 

앤서니 맥콜
1975년 뉴욕에서

(번역 유운성)



로무알트 카마카의 <히믈러 프로젝트 Das Himmler Projekt>(2000)


※ 2015년 9월 17일부터 24일까지 열릴 DMZ국제다큐영화제에 독일감독 로무알트 카마카(Romuald Karmakar)가 심사위원으로 참석할 예정이라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을 때 특별전을 마련해 초청한 바 있는 감독이다. 그는 21세기 독일영화계에서 크리스티안 펫촐트(Christian Petzold)와 더불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카마카의 경우 알렉산더 클루게의, 펫촐트의 경우 하룬 파로키의 영화적 동지이자 제자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된 펫촐트의 <피닉스 Pheonix>(2014)는 유대인수용소의 생존자 문제를 다룬 수작으로, 놀랄만큼 과대평가된 '예술연습' 영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이다 Ida>(2013) 같은 작품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영화사(史)와 인간의 역사에 접근하는 윤리적 태도도 인상적이지만 느리게 타올라 기어이 관람자를 뒤흔들어 놓고야 마는 감정적 조율이 압도적이다.) 이번 방문기간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마카 작품 가운데 한 편인 <히믈러 프로젝트>가 상영된다.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의뢰를 받아 메인카탈로그에 수록될 짧은 리뷰를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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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믈러 프로젝트 The Himmler Project / Das Himmler Projekt
감독: 로무알트 카마카 Romuald Karmakar (2000, 182분)

동시대 독일영화감독들 가운데 가장 비타협적인 인물이라 할 로무알트 카마카는 쉬이 범주화되기 힘든 독특한 작업들로 예민한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편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함부르크 강연>(2006)과 더불어 그의 가장 대담무쌍한 작품으로 꼽히는 극단적인 ‘낭독의 영화’ <히믈러 프로젝트>(2000)만큼이나 철저하게 카마카다운 영화도 없을 것이다. 카마카는 나치 독일의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가 1943년 10월 4일 폴란드의 포즈난(독일어 명칭은 포젠)에서 92명의 나치 친위대(SS) 장교들에게 행한 연설, 무엇보다 유대인절멸계획에 대한 언급으로 악명 높은 그 연설을 영화의 소재로 취했다. (이 연설은 비밀리에 행해진 것이었지만 전체가 녹음 및 보존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영화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단색의 배경막 앞에 강연대만이 덩그마니 놓인 세트에서 한 명의 배우(만프레드 자파트카)가 히믈러의 연설 녹음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하는 것이다. (3시간에 달하는 영화의 상영시간은 히믈러가 실제로 연설했던 시간과 거의 같다.) 사실 자파트카는 텍스트를 ‘낭독’(reading)한다기보다는 (매우 이례적인 방식이기는 해도) 분명 그것을 ‘연행’(performing)하는 배우로서 - 하지만 히믈러라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헐적으로 쇼트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카메라는 낭독 중인 자파트카의 얼굴을 그의 눈높이에서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데 히믈러의 연설 도중 청중이 보인 반응(가령 웃음소리)이 자막으로 제시되는가 하면, 연설 도중 말의 중단이나 실수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나고, 행사장의 보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안 히믈러가 잠시 연설을 중단하고 부하들에게 내리는 지시 또한 고스란히 낭독되는 등, 연설 자체를 재연하려 하기보다는 연설 녹음자료의 시청각적 분석을 통해 연설의 정황을 읽어 내고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쇼트의 변화는 연설의 토픽이 미묘하게 전환되는 경우나 히믈러가 청중 가운데 누군가를 바라보며 지목하는 경우 - 이때 카메라는 그 청중의 시점에서 앙각으로 히믈러를 올려다본다. - 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에 대한 기대 및 예측과 결부된 서스펜스는 대단히 강렬해지며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의미와 이유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영화를 보는 이라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법도 하다. 이것을 제1차 포젠 연설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한 미니멀리즘적 픽션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연설 녹취록의 낭독이라고 하는 사건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 물음을 픽션과 다큐멘터리 간 경계의 모호함이라고 하는 (이제는 벌써 진부하게 느껴지는) 오늘날 널리 퍼진 담론의 맥락에서 파악하려 드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히믈러 프로젝트>는 하나의 거대한 픽션을 해부하기 위해 마련된 시청각적 실험실이다. 여기서 거대한 픽션이란 히믈러가 연설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 나치 친위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가운데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틀을 완전히 다시 짜는 것이다. 통상 히믈러의 연설은 3시간에 달하는 전체 가운데 유대인절멸에 관한 5분 남짓한 부분만이 강조되고 거듭 인용되어 왔는데, 카마카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제3제국의 거대한 픽션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시 살펴보게끔 한다. 카마카의 집요한 시청각적 분석을 따라 히믈러의 연설을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히믈러 프로젝트’가 비단 나치즘 시기에 국한된 과대망상증적 픽션이라기보다는 오늘날까지도 독일을 사로잡고 있는 픽션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2000년에 <히믈러 프로젝트>가 첫 공개되었을 때 이 영화는 사뭇 예언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히믈러의 발언은 독일 주도 하의 유럽연합 체제를 좌지우지하는 ‘메르키아벨리즘’(울리히 벡)과 소름끼치게 공명하는 것으로 비친다. 즉, 카마카는 이미 화석화되고 진부한 방식으로만 언급되는 역사적 도큐먼트를 온전히 치밀하게 다시 ‘읽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동시대의 이슈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놀랄 만큼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픽션이나 다큐멘터리, 혹은 에세이 영화 같은 용어들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시청각적 문헌학(audio-visual philology)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마카는 9.11 테러범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이슬람교 지도자 모하메드 파자지의 2개의 강연 녹음자료를 토대로 한 <함부르크 강연>에서 (다시 한 번 배우 만프레드 자파트카와 함께) <히믈러 프로젝트>에서 실험한 방법론을 더 밀고 나가게 된다. 이들 작업은 ‘낭독’이라는 행위가 전면화된 정치적 미학을 실험했다는 점에서 이따금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혹은 카마카의 영화적 스승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몇몇 작업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의 텍스트에서 잠재적 의미를 끌어내거나 다른 텍스트와의 병치를 통해 새롭게 가능한 의미를 더하는 그들의 작업과 카마카의 작업을 나란히 놓는 것은 적절치 않다. 히믈러의 연설이나 파자지의 강연 같은 오명의 텍스트에 이끌리는 카마카는 무엇보다 그러한 텍스트들을 내파시키는 데서 자신의 정치성을 발견한다. 



2015-08-29

[Critique] 소마이 신지: 저항의 미메시스 + <소마이의 유령>



※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마련한 「2015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2015.7.28~8.30)를 통해 영화관에서 꼭 보고 싶었던 두 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앨버트 르윈의 <판도라 Pandora and the Flying Dutchman>(1951)로 이 테크니컬러 걸작은 할리우드 영화가 결정적인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던 - 냉전기의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와 텔레비전의 부상 등 - 1950년대라고 하는 특정한 시기에만 (마지막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놀랍도록 시대착오적인 동화들 가운데 하나다. 이번에 상영된 것은 2009년에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George Eastman House)가 디지털 복원한 판본으로 2010년에 KINO LORBER에서 DVD 및 블루레이로 출시한 바 있다. 


<Pandora and the Flying Dutchman>(Albert Lewin, 1951)


다른 하나는 소마이 신지의 <숀벤 라이더 P.P. Rider>(1983)로, 이 작품은 <러브 호텔 Love Hotel>(1985) 그리고 <이사 Moving>(1993)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마이 영화다. (<러브 호텔>은 최근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네이버 등에서 유료 다운로드 서비스 중이다.) 6년 전(2009년 9월 2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소마이의 <태풍클럽 Typhoon Club>(1985) 상영 후 "소마이 신지의 영화세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뒤 강연록의 일부를 (지금은 운영을 중단한)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것을 아래 옮겨 보았다. 소마이의 이력이나 그에 대한 비평적 평가에 대해 언급한 강연 앞부분의 내용은 생략하고 후반부의 내용만을 당시의 강연원고를 토대로 정리했다. 올해 초 미디액트에서 안건형 감독과 함께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강좌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소마이의 유령 Running to Stand Still: Somai Ghost>이라는 제목으로 소마이 신지에 대한 10분 분량의 에세이 영상을 제작한 바 있다. (이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제작한 영상물들은 인디다큐페스티발 '올해의 초점'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이 영상도 아래 링크해 두었다. 바라건대 조만간 서울에서 소마이의 전작(13편)을 볼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1. <소마이의 유령 Running to Stand Still: Somai Ghost>
(제작: 미디액트 / 촬영, 텍스트, 편집: 유운성 / 2015년 / 10분)






2. 소마이 신지: 저항의 미메시스
(2009년 9월 27일 서울아트시네마 강연원고를 부분적으로 정리한 것임)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1948~2001)에게 있어서 순간이 미학화되는 일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소마이의 영화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프레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떤 면에서 소마이는 그 이전까지 주로 일본 바깥의 평자들에 의해 '일본적'이라 이해되었던 것들을 폐기하는 작업에서 출발한 감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오즈와 미조구치를 떠올려 보죠. 사실 오즈와 미조구치가 '일본적'이라 받아들여진 것도 그들 스스로가 어떤 엑조틱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갖고 작업에 힘했기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화가 폭넓게 받아들여지면서 그들의 특정한 미학이 '일본적'인 것으로 사후에 재정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본의 많은 감독들이 알게 모르게 이들의 전통 하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영화'라고 하는 어떤 '종'이 성립된 것이죠. 적어도 1950년대 이전까지는 일본영화가 그 바깥의 이들에게 '종적'인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리 만무합니다. 아, 이것은 일본영화적인 것이다, 라는 어떤 느낌을 가능케 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은 방금 보신 <태풍클럽>(1985)에서 미카미라는 소년이 "개체가 종을 초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고민하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저는 소마이야말로 한 일본감독이라는 개인이 일본영화라는 종을 초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던 영화작가라 봅니다. 사실 이건 모든 나라의 감독들에게 자연스레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저는 한국영화라는 종이 기존에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지금 이곳에서 생성중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건 감독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불행한 일이기도 하죠. 근 15여년 동안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이만희 등등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행해졌지만 그건 말하자면 그러한 감독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영화라는 종을 기어이 사후적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에 해당하는 것이거든요. 앞서 언급한 감독들은 한국영화라는 종을 구성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사실 미처 종으로 확립되지 못한 일군의 허약한 개체들의 무리 사이에서 나타난 매우 예외적이고 탁월한 -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을지라도 - 돌연변이들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태풍클럽 Typhoon Club>(1985)


여하간 다시 소마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일본영화의 특정한 양식이 '일본적'인 것으로 인지되고 마침내 엑조틱한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적'인 것으로 즉각 인지되지 않는 일본영화를 재발명해내는 문제를 고민했던 감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예컨대 매우 일본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인 야쿠자 장르에 접근하는 데 있어 소마이가 기타노 다케시와 얼마나 달랐던가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기타노는 야쿠자 장르의 쇄신이라는 과제를 숏 자체, 프레임 자체, 편집의 리듬 자체를 미학화하는 수준에서 수행했습니다. 이런 식의 형식적 지향과 자결이라고 하는 일본적 매너가 결합된 그의 야쿠자 장르들은 당연히 1990년대를 거치며 서구평자들의 주목을 끌었지요. 여하간 기타노는 좀 미시적 수준에서 엑조틱한 '일본성'을 야쿠자 장르에 재도입한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돌스>나 <자토이치>에 이르면 아예 눈에 띄게 엑조틱한 요소들를 내세우는 바람에 거의 참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즉 기타노가 야쿠자 장르의 비장미를 형식적으로 정련한 현대감독이라면, 소마이는 야쿠자 장르의 세계 자체가 허구적인 연행(performance)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폭로하면서 해방의 쾌감을 만끽하는 쪽이죠. 그런데 그의 영화엔 어떤 식으로건 눈에 띄게 유미적인 요소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장르의 해체라고 해도 예컨대 스즈키 세이준의 그것과는 매우 달라 보입니다. '일본적'이라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미적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야말로 소마이가 서구로부터 쉬이 인지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해요. 덧붙여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하듯 소마이가 <세라복과 기관총>(1981) 같은 하이틴 변종영화로 일본 내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흥행작가라는 인식도 (부정적으로) 한 몫 했을지 모릅니다.



<세라복과 기관총 Sailor Suit and Machine Gun>(1981)


미조구치적 롱테이크와는 사뭇 다른 방식의, 구체적인 시선의 롱테이크를 시도한 소마이가 특정장르 안에서 그 장르의 주요부분을 이루는 특정 집단의 인공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오즈적 가족, 이른바 일본적 전통가정이란 소마이의 세계에선 매우 낯선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족적 삶을 이끄는 어른들이 일단 등장하지 않습니다. 혹은 등장한다 해도 아이들보다 미숙하거나 철없는 존재들일 뿐이죠. <세라복과 기관총>이나 <숀벤 라이더>(1983)에서 보듯, 야쿠자 장르의 야쿠자들 또한 소마이의 세계로 들어오면 의리와 규율이라는 허울뿐인 외양 밑에 감춰둔 서툴고 유아적인 정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야 맙니다. 그야말로 애만도 못한 어른들이 되어 버리는 거죠. 흥미로운 것은 소마이가 이것을 스즈키 세이준처럼 장르적 유희나 그 해체를 위한 냉소적인 과장으로서 그리 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당대 일본사회의 리얼함이라고 공언하는 듯한 태도에 있습니다. 그처럼 경직된 것들을 조롱하는 소마이의 방식은 바로 아이들이란 존재를 내세워 (아도르노의 표현을 맘대로 빌려 쓰자면) 그 경직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미메시스를, 모방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미메시스란 연기 혹은 연행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마이는 개인적으로 무대극이나 오페라에 굉장히 애착이 많은 감독이기도 했고 직접 연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숀벤 라이더 P.P. Rider>(1983)


소마이의 데뷔작 <돈다 커플>(1980)의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어른들이 없는 집에서 부부처럼 삽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짐짓 부부관계를 연기하고 있는 중이며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거꾸로 부부관계란 것이 얼마나 철없는 질투와 이기심으로 지탱되는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건 소마이의 원숙한 걸작 <이사>(1993)에서 실제 어른들의 부부관계를 통해 반복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세라복과 기관총>의 주인공 소녀는 사실 아쿠자 보스를 '연기'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연기'는 실제 아쿠자들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급기야 그걸 괴멸시켜 버리죠. 그걸 보며 소녀는 '쾌감'이라고 중얼거립니다. <빛나는 여자>(1987) 같은 영화는 영화 전체가 아예 펠리니적 세팅의 파이트 클럽이라고 하는 무대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태풍클럽>에서 한 소년은 혼자서 자기 집 문을 들락날락하며 "다녀왔습니다" "그래 다녀왔니"라고 말하며 자식/부모의 역할놀이 혹은 연기를 수행합니다. 소마이의 영화에서 진정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경직되고 소외된 것, 가족제도나 야쿠자 사회 뿐 아니라 통상 그러한 것들에 대한 저항이라고 여겨지는 혁명적 태도까지도 미메시스적 차원에서 묘사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통상 <숀벤 라이더>나 <태풍클럽>은 어른들이 방기한 세계에서 터져나오는 청춘들의 반항적 에너지를 묘사한 영화라는 식으로 이야기되곤 하지만, 그리고 그런 언급이 꽤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러한 반항이나 저항 자체가 아니라 저항의 미메시스를 묘사한 영화라는 점도 동시에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숀벤 라이더>의 클라이맥스에서 아이들은 돌연 집의 내외부를 돌며 모종의 공연 비슷한 행위에 몰두하고 <태풍클럽>에서 고교생들의 해방적인 광란의 춤이 시작되는 것은 말 그대로 무대 위에서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연이자 연기, 퍼포먼스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풍클럽>에서 퍼포먼스의 관객은 단 한 명, 미카미라는 소년입니다. 그는 이미 선생에게서 '15년 뒤면 너도 나처럼 될 거야'라는 말을 듣고는 우울해 있는 상태죠. 그가 퍼포먼스에 동참하는 것은 순수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약간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에서입니다. 저항도 미메시스적 퍼포먼스 앞에선 무너져내릴 뿐인 허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급기야 그는 종이 개체에게 행사하는 승리의 징표인 죽음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가를 직접 증명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의 죽음조차도 일종의 퍼포먼스로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태풍클럽>은 소마이적 주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영화라 할 수 있겠지요.



소마이 신지, <이사 Moving>(1993)


다시 한 번 "15년 뒤엔 너도 나처럼 될 거야"라는 <태풍클럽>에서의 선생의 대사를 떠올려 봅시다. 미카미라는 소년은 선생의 말과 같이 되지 않을 것임을 그 자신의 즉각적인 죽음을 통해 보여주었지만, 소마이는 15년 후에 그의 유작이 된 <바람꽃>(2000)을 발표했습니다. 이 영화엔 모종의 피로감이 덮여 있습니다. 소마이의 영화에서 경직된 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인물들의 영원한 도피처처럼 종종 묘사되어 왔던, 그리고 소마이가 유년을 보냈던 홋카이도가 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던 대사, "홋카이도는 죽기에 좋은 곳이다"라는 대사도 그가 죽은 지금에 와선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는 소마이가 거부하고자 했던 일본영화라는 종의 어떤 흔적도 느껴집니다. 당시 소마이는 이 영화를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고, 1년 뒤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게 마치 자살처럼 느껴집니다. □

※ 주

[1] 2001년 9월 9일 소마이가 53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미국영화잡지 <필름 코멘트 Film Comment>에 "잃어버린 연결고리 Missing Link"라는 제목의 소마이 소개글을 발표한다. 하스미는 소마이의 부고를 듣고 루비치의 죽음을 떠올렸다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는데, 루비치도 소마이와 비슷하게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할리우드 시절에만도 30편이 넘는 뛰어난 영화들을 남긴 루비치의 죽음에 과연 당대의 사람들이 너무 이른 죽음이라고 생각했을지 의문을 표하며, 20년 경력에 고작 13편의 영화만을, 그것도 여러모로 봐도 최고의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는 <바람꽃>을 유작으로 남기고 죽은 소마이의 죽음을 애석해한다. 그리고 소마이의 비극을 1980년대라고 하는 일본영화계의 좋지 않은 상황, 말하자면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에 연출을 시작한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보고 있다. 1980년대는 일본영화계를 70여 년 간 지탱해 온 스튜디오시스템이 붕괴된 이후인 동시에 독립적 영화작가들을 지원할 새로운 세대의 젊은 프로듀서들이 등장하기 전이었던, 어쩌면 감독들에게는 꽤나 불행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마이는 그 시기를 버텨내면서 그리고 일본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지탱하고 작가영화의 가능성 또한 모색하면서 이후 세대의 감독들이 등장할 수 있게 하는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소마이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황혼에 도제시스템을 경험하며 출발한 마지막 세대였고 – 그는 로망포르노에 뛰어든 닛카츠 연출부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23편의 로망포르노 영화에서 조감독 일을 수행했으며 거기서 만난 이전 세대의 조명기사인 쿠마가이 히데오와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다 - 1980년대 이후의 새로운 일본영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감독인 하세가와 가즈히코(소마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을 영화작가)의 <태양을 훔친 사나이>(1979)에서 조감독을 거쳤다. 그리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하세가와 가즈히코와 소마이 신지의 조감독을 거쳤다.

확실히 소마이의 때이른 죽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일본영화계 내에 어떤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모양인지 최근 일본영화들을 보다 보면 문득 그의 그림자나 그에 대한 추억이나 존경의 표지를 접하게 되는 일이 가끔 있다. 예컨대 야나기마치 미츠오의 <카뮈 따윈 몰라>의 오프닝 시퀀스는 6분 31초 동안 이어지는데, 거기서 한 영화과 학생이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의 오프닝에 구사된 롱테이크의 길이를 언급하며 친구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언급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마이의 세 번째 장편이자 최고걸작 가운데 하나인 <숀벤 라이더>다. 대학 캠퍼스 내 청춘의 에너지를 바지런히 포착하려 시도하는 이 시퀀스 자체가 소마이의 <숀벤 라이더>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시퀀스의 지속시간 역시 <숀벤 라이더>의 오프닝 롱테이크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이건 1945년 생으로 소마이와 동세대의 작가라 할 야나기마치의 추억이다. 동시대 일본감독들 가운데 가장 소마이적인 작가라 할 구로사와 기요시의 경우는 야나기마치보다 은밀하지만 보다 존경이 담긴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보도를 걷는 일군의 청소년들의 보조에 맞춰 카메라가 비스듬히 후진트래킹하는 가운데 "밝은 미래"라는 제목이 떠오르고, 이어서 카메라가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 왼쪽으로 옮겨가 후진트래킹을 계속하다 마침내 이 청소년들의 모습이 작은 화면으로 감싸이고 나면 크레딧이 올라가는 <밝은 미래>(2002)의 엔딩은 명백히 소마이의 걸작 <이사>의 엔딩을 강력히 환기시키고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 뿐 아니라 "어디로 가니?"라는 물음에 "미래로요"라고 대답하던 주인공 소녀의 모습을 떠올려봐도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붕괴직전의 가족, 철없는 어른들 사이에서 성장의 고통을 겪는 조숙한 소년이 등장하는 <도쿄 소나타>(2008) 역시 <이사>의 21세기판 리메이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며 이 조숙한 소년은 사실상 소마이의 세계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다만 소마이의 아이들 같은 발랄함은 없다.) 좀 더 거슬러 가자면 아이의 실종과 죽음 이후 범죄의 세계로 빠져들어간 샐러리맨의 이야기인 구로사와의 <거미의 눈동자>(1998)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 갑작스레 야쿠자 보스가 되어 버린 소녀의 이야기인 <세라복과 기관총>의 전도된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