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6

[Review] 언어와의 작별 3D (장-뤽 고다르, 2014)

(※ 아래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KMDB(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 진행한 "2014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특집을 위해 쓴 것이다. KMDB에서 요청한 것은 개봉작과 미개봉작을 모두 고려해 2013년 10월 3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제작, 공개된 영화의 베스트 10 리스트를 꼽고 그 가운데 한 편에 대한 리뷰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보낸 리스트와 그에 대한 코멘트는 이곳(KMDB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어와의 작별 3D



고다르의 첫 번째 장편 3D 영화 <언어와의 작별>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감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식의 편리한 변명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그것에 관해 자꾸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우리를 언어를 향해 돌려세운다. 그렇게 다시 돌아서서 언어와 마주하고 나면 고다르적 연상의 벡터를 따라 온갖 상념이 흐르고, 갈라지고, 또 퍼져나간다. 이건 작별(‘언어여 안녕’)의 말 한가운데 자리한 모음이 돌아서면 환대(‘언어야 안녕’)의 말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한국어로는 ‘언어와의 작별’보다는 ‘안녕, 언어’라는 제목이 영화의 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 ‘adieu au langage’는 고다르의 언어유희를 따라 ‘Ah dieux, Oh langage’(오 신들이여, 오 언어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 그런데 왜 신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일까? - ‘à dieu, au langage’(신에게로, 언어에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작별, 호명 그리고 지향.


    
D: 차원(Dimension)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금언 가운데 하나는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것이다. <언어와의 작별>이 3차원의 환영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입체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토록 단순한 방식으로 3D의 개념을 전복하는, 혹은 혁신하는 영화가 될 거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때로 (‘3D 안경’을 쓰고 볼 때) 좌우 양쪽 눈에 아예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입사되도록 함으로써 중첩(superimposition)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입체파적’(cubist)으로 여겨진다. 두 대의 분리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두 개의 눈에 각각 입사시켜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원리는 고스란히 차용하되, 좌우 양안에 비치는 두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으로 유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하는 순진한, 하지만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르가 3D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그의 오랜 사색의 노정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지란 사실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무엇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리얼리티의 ‘관계’이자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한 ‘생성’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가 <열정>(1982), <리어 왕>(1987), <JLG/JLG: 12월의 자화상>(1995) 그리고 <영화의 역사(들)>(1988~1998) 등에서 즐겨 인용해 온 피에르 르베르디의 『이미지』(19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얼마간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력해지고 보다 감정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유추(analogy)는 창조의 매개체이다.” 두 대의 카메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두 개의 눈이 지향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깊이의 환영이 아니라 유추를 가능케 하는 거리를 둔 둘(deux)의 관계로부터(만) 생성되는 정신적 이미지, 사유의 이미지다.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에서 선언했듯,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불러낸다.”(Toute pensée émet un coup de dés) 하지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그리고 “아무 것도 [...]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장소 밖에서는 [...] 아마도 [...] 하나의 별자리 [...] 를 제외하고는.”(rien [...] n'aura eu lieu [...] que le lieu [...] excepté [...] peut-être [...] une constellation) 여기서 이어지는 생각, 주사위 던지기와 별자리.


D: 주사위(Dice)

<언어와의 작별>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던 3D 단편영화 <세 가지 재앙>(2013)에서 고다르는 ‘3D’의 ‘D’를 ‘재앙들’(désastres)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사위들(dés)―별들(astres)’로 바꿔 읽었다. 말라르메적 상상? 물론이다.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말라르메의 시와 수리철학자 고트롭 프레게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멋대로?) 포갠다. “프레게는 사유가 수(數)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구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왜 말라르메의 주사위―별자리에서 프레게를 떠올린 것일까? (혹은 프레게에서 말라르메로 간 것일까?) 혹시 프레게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었을까? “주사위의 네 눈(目)에 대한 표상에서 우리는 ‘넷’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 수는 자립적 대상으로도 외부 사물의 성질로도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는 감각적인 것도 외부 사물의 성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수 0의 경우 가장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0개의 별을 표상하려고 해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별’이란 낱말이나 0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아무 별도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을 표상할 뿐이다.”(『산수의 기초』 제59절) 


<세 가지 재앙>은 세 개의 주사위를 통한 세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진행된다. (위 사진 참조)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에 가서는 텍스트가 주사위들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지 않고 그저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3D는 아직 그에 걸맞은 가능한 이미지 생성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고다르식의 일갈일까?) 이 주사위 놀이 클립 영상은 1977년에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12부작 시리즈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두 명의 아이들을 통한 프랑스 여행’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지어 영상 위에 입혀진 내레이션까지 고스란히 가져왔다. “괴물의 진화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미시적 사건들과 돌연변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에서는 이 뒤로 “계속되는 주사위 던지기, 하나의 하부단위에 이은 또 다른 하부단위의 생성, 이러한 우연의 게임으로부터 괴물의 신체를 형성할 수십만 번의 연쇄작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계의 수명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괴물들과 관련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섹스와 죽음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의 주사위 놀이가 세 개의 주사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3D 테크놀로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에서 고다르가 사후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대중에서 디지털 독재로. 이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언어와의 작별>에서 고다르는 (다시 세 개의) 주사위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다시 한 번, 근본문제(Grundproblem)에 대한 접근은 순진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 디지털(Digital), 0과 1이라는 거짓된 둘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디지털은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디지털 영화, 폭넓게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유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맞닿아 있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츠보리킨이 텔레비전을 발명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츠보리킨이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사실 1933년이 아닌 1923년이다. 이러한 연대 착오는 두 개의 일견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몽타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역사(들)>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진단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전 세계의 스펙터클을 허름한 침실들로 가져간다는 레옹 고몽의 꿈이 텔레비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동의 머리 위의 광활한 하늘을 엄지동자 톰(Tom Thumb)의 높이로 축소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언어와의 작별>에서 한 등장인물은 스마트폰 화면의 아이콘을 엄지동자 톰이 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조약돌과 비교한다.) ‘텔레-비주얼’(tele-visual)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독재)이 된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그에 맞선다. 디지털적 이미지가 우리의 보는 방식을 표준화한다면, 고다르는 디지털적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즉 디지털적 이미지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언어와의 작별>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가지 다른 종류의 카메라 - 캐논의 DSLR, 파나소닉의 Lumix 그리고 ‘웨어러블’(wearable) 카메라인 GoPro에 이르기까지 - 를 활용했는데, 촬영된 영상들은 균질하게 마름질되지 않은 채 뒤섞여 가히 ‘시각적 노이즈’의 카니발이라 할 만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건, 적어도 예견되는 건, 오직 이 소란 속에서다. 적잖은 평자들이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스탠 브래키지의 <독 스타 맨>(1964)을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은유를 활용”(블레이크 윌리엄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아 있다.


또 하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D: 만남으로 개시되는 둘(Deux)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 그것은 응축된 픽션이다. 그것은 픽션의 한계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픽션이다. <언어와의 작별>이 하나의 시청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여기서 고다르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붙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두 커플에 대한 두 번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한 고다르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 출연한 바 있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고다르와 작업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다르의 차기 작품에서 저는 어쩌면 호화 유람선 횡단에 참여한 철학자-강연자 역할을 맡아 한 장면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사랑 예찬』) <언어와의 작별>과 관련해서, 여기에 바디우의 다른 텍스트를 겹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베케트에 대하여』) <언어와의 작별>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곳곳에 산포된 여러 ‘둘’들, 영과 무한, 자연과 은유 그리고 고다르적 픽션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나 가능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남아 있다. 고다르적 멜랑콜리? <언어와의 작별>이 고다르의 고별사일까? 이 글에서는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원기 왕성하며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당대에 보았던 이들은 꼭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곤 했다. 영화의 폐허 속에서 ‘영화 같은 무엇’의 섬광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