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05

[Critique]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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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1905~1969)가 생전에 연출한 작품은 총 89편이다. 그는 1930년에 무성영화 <찬바라 부부 チャンバラ夫婦>(이 영화의 프린트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로 데뷔했다. 1967년에 발표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당시로선 아주 많은 작품을 찍은 것도, 그렇다고 해서 아주 적은 작품을 찍은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연출한 89편의 영화 가운데 현존하는 작품은 67편인데, 특히 무성영화들이 많이 사라져서 총 24편의 무성영화 가운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5편에 지나지 않는다. 2002년에 한국에서의 첫 회고전이 열린 이후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나루세 영화들을 살펴보면, 그의 작가적 역량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로 간주되는 1950년대나 1960년대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어 1930년대 작품 가운데선 <당신과 헤어져 君と別れて>(1933), <아내여 장미처럼 妻よ薔薇のやうに>(1935), <츠루하치 츠루지로 鶴八鶴次郎>(1938) 세 편 만이 상영되었고 1940년대 영화는 아예 한 편도 정식으로 상영된 적이 없다. 아래 글은 2011년 7월 15일에서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의 강연을 위해 준비했던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인문예술잡지 F』 제12호(2014.1.31 발간)에 게재되었다. 2011년 7월 17일에 있었던 강연의 제목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감정의 형식과 제스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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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당연히 영화로는 포착되거나 묘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이것이 가능하리라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기만적인 영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시선과 제스처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군가를 바라봄으로써, 혹은 누군가에게 보이게 됨으로써 촉발되고 다시 시선과 제스처로 표현되는 그런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시선과 제스처로 영화의 표면을 직조한 감독이자 그로써 영화적인 것을 정의한 감독이다. 심리적 내면성의 전적인 거부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영화는 시선과 제스처로 빚어진 감정의 형식 혹은 형식화된 감정이며 그러한 시선과 제스처를 통해 감정의 흐름과 흐트러짐을 펼쳐 보이는 과정 자체라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싶어

1939년에 발표된 <진심 まごころ>이라는 작품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가시적인(혹은 과시적인) 영화적 기법을 삼가면서도 서스펜스로 충만한 감정의 형식을 시선과 제스처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나루세의 장기라 할 수 있다. <진심>의 주인공 소녀는 엄마가 자기 친구의 아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녀의 옛 연인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집요하게 관찰하려 든다([사진 1]). 이때 우리의 주의는 누군가의 시선을 주의 깊게 살피는 자의 시선과 제스처로 향하게 된다. 지극히 나루세적인 시선의 삼각형. 

[사진 1]

두 사람이 앞뒤로 비스듬히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란히 걸으며 대화하는 것만큼이나 나루세적인 정경도 없다([사진 2]). 이것을 나루세는 무척이나 단순하게 분절된 몇 개의 쇼트를 통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한 쇼트의 운용을 통해 보여준다. 여기서는 망설임과 궁리의 순간과 실행의 순간이 교차되고 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에 빠져 걷던 소녀는 돌연 엄마에게 자기도 친구처럼 업어달라고 한다. 그리곤 기어이 엄마의 고개를 돌려 엄마가 친구의 아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관찰하려 든다([사진 3]). 이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나루세적인 인물이다. 바람피우는 아들과 며느리의 관계를 바라보는 <산의 소리 山の音>(1954)의 야마무라 쇼만큼이나 말이다. 그녀는 감정을 촉발하는 것은 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촉발된 감정이 다시 시선을 통해 드러날 것임을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 시선을 면밀히 관찰하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2]

[사진 3]

소녀의 불안감, 엄마가 친구의 아빠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이전에 그녀가 엄마와 할머니의 몸짓과 표정을 유심히 관찰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나루세의 많은 영화들처럼, <진심> 또한 시선으로 인해 감정이 촉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 소녀는 엄마와 할머니가 서로 은밀히 주고받는 시선을 바라보며 미심쩍어한다([사진 4]). 영화가 시작되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서다.  

[사진 4]

나루세는 종종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선의 짜임을 제시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하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촉발된 감정의 흐름과 흐트러짐의 연쇄가 한 편의 나루세 영화의 전개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바라보다 모종의 감정(애정, 불안, 질투, 증오)을 품게 되거나 혹은 반대로 누군가에게 보이게 됨으로써 어떤 감정(수치심, 죄책감, 어색함 등등)을 품게 되는 상황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은 나루세에게 있어 아주 흔한 일이다. 사실 이 시선-감정의 도식이 제시되지 않으면 나루세의 영화는 거의 성립되지 않을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봄으로써 혹은 누군가에게 보이게 됨으로써 모종의 감정을 갖게 된 인물을 바라보는 위치에 어느새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단 시선-감정의 도식이 제시되고 나면 그 운용에 꼭 필요한 만큼만 사건들이 펼쳐지곤 하는데, 이때 나루세는 극도로 생략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장면 전환도 서슴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진심>의 도입부도 마찬가지다. <방랑기 放浪記>(1962)의 경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버지가 경찰에게 맞고 모욕당하는 광경을 보는 어린 여주인공의 모습이 비친 후에 (부녀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는 나루세적 정경과 함께) 비로소 영화제목이 화면에 떠오른다. 도호 35주년 기념작으로 제작된 <흐트러진 구름>은 나루세의 잘 알려진 영화 가운데서 멜로드라마적인 특성이 가장 강한 영화인데, 오히려 그 때문인지 시선-감정 도식의 제시 - 남편을 죽인 남자를 장례식에서 맞닥뜨리곤 격한 분노에 사로잡히는 여주인공 - 가 상대적으로 다소 늦게 이루어지지만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많은 이들이 나루세의 대표작으로 꼽는 <부운 浮雲>(1955)의 도입부에도 도미오카(모리 마사유키)의 집에 찾아간 유키코(다카미네 히데코)가 그의 아내와 마주쳐 그녀에게 관찰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아내에게 관찰당하며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유키코의 모습에서, 우리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녀가 도미오카의 정부임을 추측하게 된다. 가장 과격한 형식의 시선-감정 도식과 함께 시작하는 나루세 영화는 <오쿠니와 고헤이 お国と五平>(1952)일 것이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비스듬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길을 걷는 주인공 남녀(오쿠니와 고헤이)가 등장한다. 이때 나루세는 이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행인들의 모습이 담긴 쇼트와 애써 그 시선을 회피하는 남녀의 모습을 포착한 쇼트를 지극히 냉담하게 교차시키고 있다([사진 5]). 남녀가 사람들의 시선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카메라는 점점 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불현듯 오쿠니는 발을 헛디뎌 몸의 중심을 잃고 만다. 여기서 시선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작용’한다.
    
[사진 5]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는 이 시대극은 길을 걷는 커플, 여관, 번개와 비바람, 병석에 눕는 것과 간병하는 일 등 나루세적 상황들이 총집결된 영화로, <부운>과 <흐트러진 구름>을 예견케 할뿐 아니라 나루세적 요소의 밀도로만 놓고 보자면 그 두 편의 영화를 능가하는 작품이다. (예컨대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를 “나루세적인 주제로만 구성되어 있는 거의 실험적인 작품”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바라본다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양하겠지만, 어떤 경우이건 나루세 영화에서 이러한 감정은 일단 촉발된 이후에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피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색하고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한쪽이 싫더라도 다른 쪽이 집착해서, 여하간 모종의 이유로 그들이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흐트러진 구름>에서 두 남녀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매달 전하는 보상금 때문인데, 여자는 그걸 피하려 하고 남자는 기어이 그 돈을 매개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돈은 종종 불편한 관계에 있는 자들을 마주앉게 하며, 따라서 나루세적 시선의 삼각형의 짜임을 위한 구실이 된다.


마침내 당신이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나루세적 커플이란 너무 친밀하게 바라봐서는 안 되거나, 서로 바라보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거나, 심하게는 서로 바라보는 것이 (서사적인 수준에서건 형식적인 수준에서건) 금지된 커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녀 커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나루세 영화만을 놓고 보면, <오쿠니와 고헤이>, <부운>, <산의 소리>, <흐트러진 구름>은 시선의 교환이 자유롭지 않은 커플이 등장하는 나루세적 멜로드라마의 정수가 담긴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멜로드라마들은 커플 가운데 한 편이 다른 편으로 하여금 어떠한 구속도 없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끔 특별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 우리는, <흐트러진 구름>의 결말부에서 미시마(가야마 유조)가 유미코(츠카사 요코)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갑작스레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왜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나루세의 멜로드라마는 운명의 손길이 없는 멜로드라마이다. 운명적 사랑이나 비극적 숙명은 거기 어울리지 않는다. 나루세의 멜로드라마는 사랑이 불가능한 조건 하에서, 나아가 사랑이 이미 파국을 맞은 상태에서 시작되는 ‘사건 이후의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인물들은 대단히 세속적이어서 사랑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초월 - 도피나 동반자살 - 하려 들기보다는 조건의 테두리 안에서 다만 이동할 뿐이다. 수직적 초월이나 하강보다는 수평적 이동을 택하는 것이다. 나루세의 영화에 굳이 무언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의 운동이 있다면 그건 플래시백 정도다. <부운>에서 잘 드러나듯, 과거-이미지 속에 담긴 사랑은 흐르지 않는 사랑, 아름답지만 결정화된 사랑이다. 

조건을 초월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은 오직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만, 흐르는 동안에만 가능하다. <산의 소리>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애틋한 감정이 극대화되는 것은 그 둘이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할 때다. <부운>의 남녀는 도미오카의 근무지인 남쪽의 섬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비로소 사랑을 다시 찾는 듯하다. <오쿠니와 고헤이>의 오쿠니(고구레 미치요)에게 남편의 암살자를 찾아 죽이는 것은 곧 여행의 끝이자 고헤이(오타니 도모에몬)와의 연정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녀는 고헤이에게 말한다. 남편의 암살자를 찾아 복수하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라고. 그렇다면 나루세 영화에서 나란히 혹은 비스듬히 서서 길을 걷는 커플의 모습이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어떤 감정에 의해 떨림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며 그 떨림은 오직 운동을 통해서만 지속될 것임을 알고 있으나, 그 떨림이 과도하게 증폭되거나 노출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시선의 지속적인 상호 교환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기에, 함께 있으되 시선을 교환하지 않아도 되는, 나란히 혹은 비스듬히 서서 걷는 운동을 선택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여관에 묵을 때면 종종 연회나 공연장면이 삽입되곤 하는 것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연회나 공연을 관람할 때는 시선의 지속적 상호교환에 의한 감정적 자극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갓 교제를 시작한 커플이 서먹한 긴장의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있되 서로 시선을 교환할 필요는 없는 장소 - 예컨대, 영화관 - 로 향하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런데 때로 퍼포먼스 도중에 시선을 돌려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흐트러진 구름>에서 연회 도중 한 여자가 유미코에게 “남편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면서요?”라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금 감정이 고개를 든다. 오쿠니와 고헤이도 공연 관람에 임하며 서로 간에 어색한 시선을 교환하는 일을 피하려 드는데 결국 타인들의 시선 때문에 그 자리에 오래 머물기가 불편해진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또 누군가에게 보이게 된다는 것이 나루세 영화에 서스펜스를 도입하기는 하지만, 인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시선은 그들에게 감정의 떨림이나 파열을 가져오는 고통스럽고 잔혹한 것이다. 가히 응시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누군가 다른 이를 바라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혹은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없는 곳을 찾아서 나루세의 연인들은 이동한다. <오쿠니와 고헤이>의 도입부에서 적나라하게 표명되었듯이, 사회란 시선들로 짜인 감옥이며 여기서 연인들은 연인이 되기 위해 오직 그들만이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어디론가 간다. 하지만 어디에나 시선이 있다. <흐트러진 구름>에서 비오는 날 강변 선착장에 있는 미시마와 유미코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내의 그것처럼. 미시마는 말한다. “왜 우릴 계속 쳐다보는 거야.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책감으로 인해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짜임이 죄책감을 불러들이는 식이다. 

 [사진 6]

<부운> 종반부의 한 장면([사진 6])을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데도 나루세 연출의 미묘함이 무척이나 잘 드러난다. 병석에 누운 유키코는 간병인 여자와 도미오카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때 그녀의 시선은 (눈동자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간병인에게서 도미오카에게로 슬쩍 향하는데, 그 시선에는 저 둘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의심 같은 게 묻어난다. 이는 영화 도입부에서 유키코를 훑어보던 도미오카 아내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는 다른 암시도 있다. 간병인 여자와 도미오카가 앉아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꼭 부부의 그것처럼 보인다. 이는 유키코 스스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정경이다. 창 너머로 간병인이 도미오카를 배웅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유키코의 시선에는 의심으로 인한 자포자기인지 그저 도미오카가 일주일간 집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른다. 서사적으로는 후자 쪽이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나루세 영화의 시선-감정의 도식을 떠올려 보면 전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그녀는 바라본다는 행위가 주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바라보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초래하는 감정의 운동을 이젠 멈춰버리고 싶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 곧 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오카가 그의 아내, 베트남 가정부 및 다른 여자들과 관계 맺을 때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유키코가 마침내 여기서 굴복하고 마는 이유는 그것이 (그녀가 그토록 소망하던) 가정의 정경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 이후로 도미오카는 다시는 유키코의 시선을 받지 못한다. 그가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그녀는 죽기 직전의 상태다. 이때 비로소, 도미오카는 그 무엇도 바라보지 않는, 바라보지 못하는 유키코를 바라본다. 그것도 오직 그녀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도미오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흐트러진 구름>의 미시마가 유미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생각해 볼 수 있다. 시선-감정의 도식으로부터 전개되는 영화적 구조를 고려할 때, 나루세적 멜로드라마가 커플 가운데 한 편이 다른 편으로 하여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끔 특별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시마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유미코에게 죄책감을 촉발시킬 뿐이다. 미시마는 자신을 한 번이라도 죄책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퍼포먼스는 그 수행자를 그저 연기자로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시선을 자유롭게 한다. 퍼포먼스의 제스처는 시선으로 인해 부과된 불편함을 누그러뜨린다. 그래서 미시마는 그 특유의 딱딱함과 무뚝뚝함이 깃든 표정과 제스처로, 오직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를 행하는 중이다([사진 7]). 37년에 걸친 나루세의 영화적 이력이 이 단 하나의 장면에 응축되어 있다. 운명의 손길이 없는 지극히 세속적인 서사에 나루세적 시선의 역학(力學)이 운명처럼 개입할 때만큼 잔혹한 순간도 없다. 유미코는 그의 퍼포먼스를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바라볼 수 없었거나 바라보기를 피했던 이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도 오직 그만을 바라본다는 것이 여정의 끝, 흐름의 끝, 사랑의 끝을 알리는 것이라는 나루세적 시선의 물리학을 불현듯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