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7

[Causerie]
예술가의 동영상 - 태시타 딘의 <필름>과 르네 도말의 『마운트 아날로그』 - 박찬경의 <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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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영미권에서 나온 미술 관련 글이나 소식들을 찾아 읽다 보면 기이한 용어 하나를 종종 -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분명 예전보다 훨씬 자주 - 접하게 된다. 주로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영상작품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예술가의 영화'(artists' film)라는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작년에 나온 A.L. 리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의 역사 A History of Experimental Film and Video』 한국어 번역본에는 '작가주의 영화'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다. 이 외에도 리스 책의 국역본에는 심각한 오역이 적지 않다.) 여하간 이 용어는 일부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평론가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한국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영화평론가들에겐 그야말로 괴이한 용어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artist'를 '예술가'로 받아들이건 - 그렇다면 '비(非)예술가의 영화'라는 더욱 괴상한 용어도 여하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미술가'로 받아들이건 - 우리는 굳이 파솔리니의 영화를 '문인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를 '화가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테렌스 맬릭이나 (소피 파인즈와 작업한) 슬라보예 지젝의 영화를 '철학자의 영화'로 부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 괴이하게 여겨지긴 마찬가지다. 

내겐 이 괴이한 용어가 미술이 자신의 영토를 상실하고 있다는 데서 느끼는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학의 시대는 한참 전에 지났다고 떠드는 이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파솔리니의 영화작업을 '문인의 영화'라 부름으로써만 연명될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하는 이가 과연 있을까?)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을 벗어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의 에너지와 잠재력은 상실한 채 아방가르드'적' 작업 자체가 미술 제도 내의 주류가 되는 과정을 거쳐, 어느덧 개념적이고 담론적인 작업이 미술계를 지배 - 오도된 비판이론의 아련한 그림자와 더불어 - 하게 된 이후, 급기야 미술은 타 예술에 굳이 예술(혹은 미술)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주는 '승인'의 작업, 혹은 타 예술의 특이성(singularity)에는 적절히 눈감은 채 그것을 '전유'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되찾으려 드는 것 같다. 영화는 물론이요, (미술계에서는 사운드 '아트'라는 용어로 부르길 선호하는) 실험적인 음악을 비롯해, 퍼포먼스, 산업디자인, 아카이빙과 '과정'(process) 자체[과정으로서의 미술], 나아가 과학까지도 - 요즈음의 '융복합' 예술 담론들 - 미술의 시혜 대상이 된다. (사실, 이와 같은 전방위적 접근은 새롭다기보다는 오래된 것이다. 미래주의, 큐비즘,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의 기획(program)이 동시대 미술 사업의 전략(business strategy)으로 탈바꿈된 것일 뿐이다.)

나는 이 시혜의 의지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미술이 타 예술을 자리매김하고 짜임을 만드는 작업을 떠맡아선 안될 이유도 없다고 본다. 오히려 장려할 만한 일이다. 궁극의 예술엔 영토가 없을 것이다. 아니, 예술조차도 아닐 것이다. 첨언하자면, '불순한 영화'(cinéma impur / impure cinema 혹은 mixed cinema)의 옹호자로서의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가 영토 없는 예술이, 영토들을 가로지르는 강이, 대지로 스며드는 '보이지 않는 지하수로'(invisible galleries)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한편, 오늘날 우리는 과도하게 가시적/과시적인 갤러리들의 범람을 목도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1) 타 예술에 대한 존중이 없이 오로지 미술적 배치만을 앞에 내세울 때다. 이는 주로 타 예술을 갤러리나 뮤지엄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작년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렸던 「퍼포밍 필름 Performing Film」 전(2013.4.11~6.15)은 거의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원래의 종횡비가 무시된 채 영사 중인 작품들(질리안 웨어링의 <페컴에서의 춤 Dancing in Peckham>(1994)과 데이빗 힌튼의 <눈 Snow>(2003)), 거의 원래의 사운드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낮게 조절된 볼륨(쉘리 러브의 <클링 필름 Cling Film>(2005)), 어떤 원칙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전시 핸드아웃의 작가 표기 - <셋 인 모션 Set in Motion>(2012)의 경우, 안무가 빌리 도르너의 이름만 표기되어 있을 뿐 감독인 미하엘 팜의 이름은 핸드아웃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  등등. 작품들은 감상을 위해 전시(exhibition)되는 것이 아니라, 조악한 책의 도판처럼 예시(illustration)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전시는 (비록 체험되지는 못할지언정) 큐레이터의 '구상'만은 대략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3X3D」 (2014.1.22~3.16) 상영프로그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고 본다. (2) 둘째는 타 예술(적 매체)에 대한 미술의 개입이 그 자체로 미술의 영역을, 혹은 타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킬 것이라는 가정이다. '예술가(미술가)의 영화'라는 기이한 용어법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왜 그저 '영화'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여기에 귀속('~의')이 필요한 것일까? 영상이 현대미술의 주요 작업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예술가의 동영상(artists' moving image)이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작년에 아트선재센터의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3 Real DMZ Project 2013」 전(2013.7.27~9.22)에서 전시된, 시네마도, 필름도, 비디오도 -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는 이 용어들은 실은 만만찮은 계보의 의미들이 켜켜이 쌓인 지층이다 - 아닌 동영상이라고밖엔 부를 수 없는 함양아의 <공산주의 관광 Tourism in Communism>(2005)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한편으로, 이 전시에는 박찬경의 근사한 -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최고의 작품인 - <파워 통로 Power Passage>(2004) 같은 영상'관련' 작품도 있었다. 이는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 비디오 영상 및 몇몇 설치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혼합 매체(mixed media) 작품이다. 미술이 영토의 상실을 근심할 필요가 없음을 일러주는, 미술적 접근으로서만 가능한 진정 비평적인 작업의 한 사례.) 이때 우리는 '무빙 이미지'라는 사이비-아카데미즘적인 표기를 따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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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태시타 딘의 <필름 FILM>(2011)처럼 문자 그대로 예술가(미술가)의 '필름'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14년 2월 28일까지 전시된다.) 분명 이 작품은 '영화'(cinema)의 영토에 자리매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통상적인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 경우 이 작품이 지닌 조형적이고, 건축적이며, 무엇보다 기념비적인 특성은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 안타까운 건, 이 작품이 2011년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될 때는 13m 높이의 스크린에서 상영되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6.5m 높이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는 탓에 원래의 기념비적 특성을 상당 부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관람객이 스크린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아예 금지하고 있기까지 하다.

태시타 딘의 <필름 FILM> (무성, 11min)

태시타 딘이 이 작품을 만들 당시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고 밝힌 것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작가 르네 도말의 초현실주의 소설 『마운트 아날로그 Mount Analogue이다. (이 소설에 대한 태시타 딘의 언급이 담긴 동영상 및 기타 다른 자료들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이 소설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마운트 아날로그』와 <필름> 사이의 비교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겠지만 - 가장 단순하게는 태시타 딘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필름의 산'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 나는 무엇보다 도말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야말로 <필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본다. "침묵의 시간에 대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시뿐일 것이다."(『마운트 아날로그』,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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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찬경의 <만신 Ten Thousand Spirits>(2013)을 보았다. 시사 후 인상은 다음과 같다. 지미짚으로 촬영된 첫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이것이 결국 영화로 성립되지 못하는 영상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쇼트의 카메라워크가 만신 김금화에게로 다가가는 영(靈)의 움직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 - 혹은 '카메라와의 접신' - 임은 너무 쉽게 보였고, 그녀의 '퍼포먼스' 중간중간을 잘라내고 슬쩍 디졸브로 이어붙인 편집은 안이하게 여겨졌다. 영화의 마지막엔 허공으로 치솟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bird's-eye view)으로 찍힌 쇼트가 등장한다. 예측가능한 - 예측이 어긋나기를 바랐지만 - 도식적인 수미상응. 다큐와 픽션이 실험적으로 혼재 - 이제는 무척이나 식상하게 여겨지는 표현이긴 하다 - 되어 있다고 들은 바와는 달리,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생각보다 영화는 TV 재연(reenactment) 프로그램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미술적 동영상에 가까운 장면들은 - 1970년대의 김금화(문소리)가 한 노인을 뒤쫓아 가는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 개념은 전달할지언정 경험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김금화의 구술의 풍성함은 종종 시대적 지표들(한국전쟁, 새마을운동...)과 그러한 지표들과 결부된 에피소드들 및 자료화면들(의 지나치게 틀에 박힌 활용)에 의해 가로막히곤 한다. 1980년대 말부터 김금화가 TV 프로그램에 종종 출연하게 된 이후 TV가 그녀를 이용한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다고 읊조릴 때처럼 과도하게 친절한 내레이션은, 뻔한 해석을 사뭇 진지하게 들려주는 미술관 도슨트의 그것을 닮았다.

물론 <만신>이 온갖 TV 다큐멘터리적 상투구에 대한 비평적/비판적 모방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비평적/비판적 모방이 상투구들의 면밀한 조사에 의거한 것이 아닌 까닭에 결국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말 뿐이며, 결국 비평/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과 같은 평면에 놓이고 만다는 점이다. (한국작가들의 작업 가운데 영상물의 상투구를 비평적/비판적으로 빼어나게 모방한 예로, 나는 현시원 큐레이터의 추천으로 보게 된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 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를 떠올린다.) 예컨대, 김금화는 그녀가 출연했던 이런저런 TV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친 것 이상으로, <만신>의 카메라 앞에서 시종일관 지극히 의식적인 '연기'를 펼칠 뿐이(라는 게 환히 보인)다. 이는 작가가 인물에게 얼마간 거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취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김금화와 송영길 인천시장의 대화(연기), 그녀와 그녀 전남편의 대화(연기)는 화면구성이나 쇼트 사이즈 모두에서 지극히 어정쩡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는데, 이것이 의도인지, 실수인지, 무심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박찬경은 2인 이상의 인물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는 데 있어 아주 취약한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