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30

레이몽 드파르동 (Raymond Depardon)


(지난 6월 6일 레이몽 드파르동의 다큐멘터리 <프랑스 다이어리 Journal de France>(2012)가 개봉되었다. 전작 <모던 라이프 La vie moderne>(2008) 이후 4년 만에 발표한 장편이다. (사무실 퇴근 이후에 보려고 해도 상영시간이 잘 맞지 않아 여태까지 보지 못하고 있다.) 2009년 11월 1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모던 라이프> 상영 이후 드파르동의 작품세계에 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강연용 메모의 일부를 정리해 이곳에 올려 둔다. 강연 후반부 <모던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은 삭제하고 드파르동의 작업에 대해 포괄적으로 소개한 전반부 강연 내용만을 정리했다.)



레이몽 드파르동은 그 경력에 비해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사진 쪽에 관심 있는 이들이 드파르동이라는 이름에 보다 친숙하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다큐멘터리스트들 가운데 장 루슈라든가 크리스 마르케 등은 어느 정도 국내에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알기로, 드파르동의 작품, 특히 영화작품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경력이 벌써 30년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국내 영화제, 아트하우스 영화관 및 시네마테크 문화에서 프랑스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보면 꽤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게 비단 국내에만 국한된 일은 아닌 것 같다. 드파르동의 (사진작품이 아니라) 영화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회고전이 프랑스 바깥에서 열린 것은 2005년이 처음(암스테르담다큐멘터리영화제)이었던 걸로 안다. 국내에서는 <지방법원 제10호실 10e chambre - Instants d'audience>(2004)이 2004년 광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농부의 초상 Profils Paysans> 3부작 가운데 2부가 2006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리고 3부에 해당하는 <모던 라이프 La vie moderne>(2008)가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그 외에는 <니스에 관하여: 조곡>이나 <그들 각자의 영화관> 같은 옴니버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든 단편이 소개된 바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 강연은 우선 드파르동의 바이오그래피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사진1] 레이몽 드파르동의 첫 프레스 카드. "이미지 사냥꾼"(chasseur d’images)이라 적혀 있다.

레이몽 드파르동은 스스로의 과거 작업들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일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한 작가인 탓에, 이미 1984년, 자신이 12세 때였던 1957년부터 1977년까지 촬영한 것들을 자료로 삼아 거기에 코멘트를 붙인 자전적인 에세이 필름 <사진 찍던 시절 Les annees declic>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그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십대 초반부터였는데, 그가 사진에 몰두하게 된 것은 실제로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가 그 농촌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사진작업, 훗날 영화에도 투신하게 될 이 이미지 사냥꾼 – 그가 사진과정에 등록하면서 처음 얻은 프레스 카드에는 "이미지 사냥꾼(chasseur d’images)"이라 적혀 있었다. – 의 작업은 그를 다시 농촌으로 이끌게 된다. <농부의 초상>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18살이 되던 해엔 군복무 차 알제리로 가게 되었는데, 그의 임무 가운데는 전쟁 르포르타주 사진을 찍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는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언론사진을 찍는 일에 종사했는데, 바로 이러한 포토저널리즘이야말로 드파르동 작업의 기원이자 그가 끝없이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대안적 작업을 구상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1967년에는 동료인 질 카롱과 함께 자신의 포토에이전시 “감마”(Gamma)를 설립하고,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아프리카 등을 방문했다. 1974년, 즉 그가 첫 장편다큐멘터리 <1974년 선거 캠페인 1974, une partie de campagne>을 찍었던 해에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칠레에서의 쿠데타를 기록한 <칠레>라는 제목의 르포르타주 사진집으로 로버트 카파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 뒤로도 사진작가로서 드파르동의 경력은 꽤 화려하다. 1977년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1979년에는 감마를 떠나 유명한 매그넘 그룹에 합류해, 이 그룹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레바논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사진들을 발표했다. 

[사진2~5] 드파르동의 사진집 <가레의 농장 La ferme du Garet>(Paris, Editions Carré, 1995)에 실린 사진들

사진작가로서의 드파르동의 경력을 살펴보는 건 이보다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고,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그치고자 한다. 다만 드파르동의 사진과 관련해서 하나 지적해 두고 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한국에서 소개된 <지방법원 제10호실>이나 <농부의 초상>처럼 인물과 목소리의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만을 본 이들로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그의 사진은 종종 영화와는 달리 무인의 풍경, 텅 빈 풍경을 포착하고 있으며, 인물이 등장한다 해도 대개는 카메라에 등을 돌리고 있거나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든 자세로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후에 다시 말하겠지만, 드파르동에게 있어서 영화는 결코 사진의 연장이 아니다.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다. (드파르동의 초기영화들에 대해서는 엄격히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겠지만) 드파르동은 영화가 인간의 얼굴과 제스처와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 매우 특권적인 매체라는 점에 입각해 작업해 왔다. 반면 사진은 공백 혹은 공허의 연출에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매체처럼 간주된다. (어떤 면에서 드파르동의 사진 작업은 그 공백, 텅 비어 있음의 연출에 있어 영화적으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과 친연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영화작업을 한 뒤에 그와 관련된 – 그러면서도 매우 다르고 독립적인 – 사진집이나 책을 내곤 했던 것도 뒤라스와 닮은 부분이다). 드파르동은 인간의 얼굴이 정지된 채로 포착되는 것, 이러한 사진의 능력(즉,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능력)에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이런 그가 영화에서는 그토록 집요하고 내밀하게 인간의 얼굴 - 예컨대 <모던 라이프>에서 마르셀의 얼굴 – 을 들여다본다. 시시각각 변화하지 않는 얼굴은 죽은 자의 얼굴 뿐이다. 따라서 사진 속의 모든 얼굴은 잠재적으로 죽음의 얼굴이 된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드파르동의 첫 다큐멘터리는 <얀 팔라치 Ian Palach>라는 제목의 12분짜리 단편으로 1969년에 만들어졌다. 얀 팔라치는 소련의 체코 침공에 항의하는 뜻으로 1969년에 분신자살한 청년인데, 영화는 팔라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 1분 동안 모든 사람들과 차량들이 멈춰 서서 침묵의 애도를 표하는 광경을 담은 강렬한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팔라치에 관한 시민들과의 인터뷰 등이 삽입되어 있다.) 여기서 목소리의 부재가 두드러지게 강조된 것은 이미 매우 드파르동답게 여겨진다. 이후 [이 강연이 이루어진 2009년까지] 드파르동은 단편작업은 제외하고 장편영화로만 꼽아본다면 15편의 다큐멘터리와 3편의 극영화를 연출했다. 

드파르동의 초기작업들을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프랑스 다큐멘터리 전통보다는 그가 포토저널리스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1960년대에 막 전성기를 맞았던 미국식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에 깊이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사진에 있어서도 그는 워커 에반스 같은 미국 사진작가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장편다큐멘터리인 <1974년 선거 캠페인>은 이미 그 기획에서부터 다이렉트 시네마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겠는데, 다이렉트 시네마의 붐을 이끌었던 ABC 방송국 로버트 드류 팀의 <예비선거 Primary>(1960), 즉 휴버트 험프리와 존 F. 케네디 간의 민주당 예비선거 과정에서의 사건과 순간들을 기록한 이 작품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1974년 선거 캠페인>은 1974년에 있었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프랑수아 미테랑 과의 대통령 선거전을 배경으로 지스카르 데스탱의 선거 캠페인을 다루고 있다. (당시 지스카르 데스탱은 결국 미테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영화가 특별히 주관적인 개입 없이 데스탱의 선거전 기간 동안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데스탱의 자잘한 제스처나 버릇 등이 세밀하게 포착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묘하게도 그의 됨됨이 – 말하자면 허울 좋은 광대 – 가 느껴지는데, 이것이 그저 암시적인 정도가 아니어서 결국 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직접 지원했던 데스탱의 분노를 사게 된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이 다큐멘터리의 공개를 금지했고 30여년이 지난 200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반 공개가 가능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한 교훈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하간 드파르동은 이후 드류 팀의 다이렉트 시네마 전통보다는 다소간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작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작업들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말하자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명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드파르동의 영화작업은 <1974년 선거 캠페인>이 마지막이 된 셈이다. 와이즈먼의 영향은 그가 제도/기관(institution)에 기울인 관심의 소산이라 할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베니스의 정신병원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산 클레멘테 San Clemente>(1980)와 <응급실 Urgences>(1987), 경찰관들의 일상을 담은 <사건들 Faits divers>(1983), 그리고 <지방법원 제10호실> 등이 그 예다. 

[사진6] 프랑스에서 출시된 <농부의 초상> DVD 표지

오늘날의 드파르동의 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전혀 이름이 없는 아무개들을 대상으로 오랜 촬영과 기다림 끝에 얻어낸 매우 평범한 순간들의 연쇄 속에서 기묘하게 감정적인 울림을 끌어내는 방식이라 하겠는데, 사실 사진작가로서의 그는 이른바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이라고 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보다는 "별다른 사건이 없는 시간들"(temps faibles)이 지닌 감정적 가능성에 믿음을 갖고 있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이런 식의 접근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모던 라이프>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폴 아르고(3부작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라고 하는 고집 세고 고독한 농부와의 대화 장면 같은 것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운드는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카톨릭 장례식 방송에서 나오는 것이고, 드파르동과 폴 사이의 대화는 (15년 동안 알아온 사이가 아니라)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어색한 대화만큼이나 열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감정적 힘을 발하는 것은 대화 사이의 어색한 침묵들 덕택이다. 

<농부의 초상> 3부작은 드파르동과 농부들간의 오랜 관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작품임이 분명한데도, 여기서 드파르동과 농부들 간의 감정적 교류가 강조되는 순간이 결코 없어 보는 이를 의아하게 만든다. 사실 여기엔 드파르동의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이 영화가 개봉된 2008년,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드파르동과의 긴 인터뷰를 실었는데 – 특히 이 영화에서 사용된 새로운 35mm 카메라 및 녹음장비의 활용과 관련해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 거기서 그는 자신의 작업방식은 환대를 누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농부로서 가업을 잇는 것을 피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지 모른다고 밝히면서, 농가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 죄책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곤 했다고 고백한다. <농부의 초상>의 촬영과정은 농가를 방문하기 전에 농부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차를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촬영을 약간 하고, 그리고 나면 "이제 그만 가자구"하면서 자리를 뜨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강연 내용은 생략함]



2013-06-19

닻올림 & 2013년 상반기에 쓴 글들


1. 닻올림

즉흥음악 연주공간 닻올림(dotolim.com)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작년 9월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문예술잡지 F> 제7호(2012년 10월 30일 발간)에 실린 함영준의 글 "사운드 아트의 (불)가능성에 관한 짧은 노트" 덕택이었다. (이 글은 <인문예술잡지 F> 홈페이지(f-magazine.saii.or.kr)에서 원문 전체를 PDF로 볼 수 있다.) 작년에 처음 열린 즉흥음악 페스티벌 '닻올림픽' - 올해 10월에 제2회 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라 한다. - 에서 국내외 실험적 즉흥음악 연주자들의 공연을 접한 뒤, 이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인 진상태가 2008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닻올림 정기연주회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매번 기회를 놓치다가 이번 주 월요일(6월 17일)에 열린 46번째 연주회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날 공연은 진상태, 류한길 그리고 (핀란드에서 온) 일포 헤이키넨(Ilpo Heikkinen)의 연주로 꾸며졌다. (닻올림 홈페이지에는 그간의 연주 기록영상들이 꼼꼼히 아카이빙되어 있고 이날의 연주를 기록한 영상도 이미 업데이트되어 있다.) 연주자들은 통상적인 악기가 아니라 이런저런 사물들과 음향기기들로 음악적 구조 내에 포섭되지 않고 의미화될 수도 없는 소리들을 '주의 깊게' 만들어 내는데, 이 소리들이 서로 충돌하고, 때론 우연히 조응하면서 만들어내는 '사건들'을 듣는 묘미가 쏠쏠하다. 최근 나는 이 실험적인 음악과 동시대 영화의 어떤 가능한 만남에 대해 상상해 보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실험영화작가 이행준의 최근 (필름 퍼포먼스) 작업이나 루시엔 캐스텡-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의 <리바이어던 Leviathan>(2012) 등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실험영화작가 켄 제이콥스(Ken Jacobs)와 뮤지션 존 존(John Zorn)과 이쿠에 모리(Ikue Mori)의 2004년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서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Celestial Subway Lines / Salvaging Noise>를 떠올려 본다.)


 

2. 2013년 상반기에 쓴 글들

<인문예술잡지 F> 1호와 2호에 연재하다 중단하고, 다시 7호에 연재를 계속한 뒤 또 중단한 글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집필에 다시 착수하려 한다.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의 <13개의 호수 13 Lakes>(2004)와 캐스텡-테일러와 파라벨의 <리바이어던>을 중심으로 '아트 갤러리로서의 영화관'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하는데, 10호 발간 전에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와는 별도로, 올해 들어 쓴 글들과 기록물들이 몇 개 있어, 이곳에 정리해 둔다.

"넝마주의가 최고의 역사가인 이유: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 (<프레시안>, 2013.2.8)
"노동의 시간, 예술의 시간: <서울역>(2013)의 배윤호 감독과의 대담" (<인문예술잡지 F> 제9호, 2013.4.30 발간)
"신의 숨바꼭질: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우화와 노년의 희극" ('몬테이로와 그의 친구들' 카탈로그 & <인문예술잡지 F> 제9호. Web Exclusive)
"몬테이로를 말한다 - 페드로 코스타, 유운성, 김성욱 대담" (서울아트시네마, 2013. 5.11 녹취)
"애니메이션과 리얼리즘의 처소: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전' 카탈로그, 2013.6.3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