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05

우정의 이미지들


(아래 글은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특집: "우정이란 무엇인가?". 2013년 7월 31일 발간)의 서문으로 썼던 것이다.)




우정의 이미지들
- 한 권의 잡지와 상상의 전시의 서문을 위한 일곱 개의 단상



1

지난 겨울의 일이다. 나는 겨울 같은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세르주 다네의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를 읽다가 잠시 한곳에 눈을 멈추었다. “유대 그리고 우정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우정이라는 관계 이외에 사람들과 다른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우정(우정이라는 관념, 우정이라는 말의 정언명령)은 섹스를 포함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나는 다네의 이 책을 5년 전 영역본으로 처음 읽었다. 그때 나는 저 말들 앞에서 눈을 멈추었던가? 어쩌면 그랬을지도. 하지만 기억은 종종 우리를 속이고 우리 또한 기억을 기만하기 일쑤이므로 그의 말은 슬쩍 흘려듣는 것으로 족하리라. 시간은 언제나 우리와 불화하며 우리가 기억과 우정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하간, 다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인간관계에 관한 한 우정의 여백이란 없다. 우정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손쉽게 우정 바깥에는 무지, 무관심 그리고 적대가 있다고 답할 수도 있겠다. 무지와 무관심의 문제는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그런데 우정으로부터 기인하지 않은, 우정에 토대하지 않은, 우정과 무관한 적대(숙적)를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존경이나 연민을 우정이라 착각하는 만큼이나 종종 경멸이나 질시에서 비롯된 관계를 적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와 같은 내려다봄 혹은 올려다봄으로 형성되는 기울기는 동일한 평면에 자리한 자들 사이에서 감정의 벡터들이 자아내는 우정이나 적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속한 대지를 둘러보았다. 


2

우정은 주체가 스스로를 낯설게 보는 데서 시작되는 무엇이다. 자기의 타자화 없이 이루어지는 교류는 결코 우정이라 불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타자화가 전제되지 않은 적대 또한 있을 수 없다. 진정한 숙적은 언제나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은 합의, 결탁, 야합, 공모 혹은 생물적학적인 의미에서의 공생은 될지언정 결코 우정은 아니다. 홀로됨의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관계는 우정과는 무관하다. 조르조 아감벤의 「친구」라는 짧은 강연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친구는 또 다른 자기(heteros autos) [...] 친구는 또 다른 자아(altro io)가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하는 타자성, 자기 자신의 타자되기이다. 내가 나의 존재를 즐거운 것으로 지각할 정도로, 나의 지각은 나의 존재를 분리시켜 친구, 즉 다른 나 자신으로 옮기는 함께-지각하기에 의해 관통된다. 우정은 자기의 가장 내밀한 한가운데에 있는 이 탈주체화이다.” 이와 같은 아감벤의 진술은, 폴 리쾨르가 『번역론』에서 (앙트완 베르만을 경유하여) 번역을 낯선 것이 주는 시련을 통해 주체가 스스로의 낯섦을 깨닫기 위한 ‘언어적 환대’(linguistic hospitality)로 재정의한 것과 기묘하게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탈-주체화’란 우정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지 우정 자체와 곧바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 아감벤의 ‘우정의 정치학’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가 지적한 대로 우정이란 한 주체의 속성이나 성질이 아니며, ‘친구’라는 단어는 비(非)술어적 용어에 속한다. 어쩌면 우정의 존재론은 아감벤이 『세속화 예찬』에서 제안한 게니우스(genius) 혹은 스페키에스(species)적 존재에 대한 숙고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정이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비인격적인 것(게니우스), 혹은 비실체적이고, 고유의 장소를 갖지 않기에 오직 기체(基體) 속에서만 나타나고 발견될 뿐인 것(스페키에스적 존재)과 우리의 관계 맺음의 한 양상이다. 거울과 거기 비친 이미지는 기체와 스페키에스의 관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예다. 그 이미지는 거울을 통해 존재하지만 거울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미지는 나로부터 기인하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우정은 우선 내 앞에 거울(과 같은 것)을 두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정은 그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존재하면서 그것과 나 사이의 간극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거울을 내 앞에 두어야 할 것인가. 


3

대개 우정의 관계는 ‘친구’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된다. ‘A와 B는 친구다.’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이 문장은 ‘A와 B는 한국인이다.’ 같은 문장과 형식적으로 닮아 있다. 그런데 ‘A와 B는 한국인이다.’는 ‘A는 한국인이다.’와 ‘B는 한국인이다.’라는 요소문장으로 분석 가능하지만, ‘A는 친구다.’와 ‘B는 친구다.’같은 문장은 문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친구’라는 단어가 주체의 성질이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하지만 이는 모종의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모든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연인, 부부, 동료 같은 단어 말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우정의 정치학에 근간하지 않은 연인, 부부, 동료란 짝짓기에 대한 성적, 제도적, 사회적 명명에 불과한 것이라 답해야 할 것이다. 세르주 다네가 인간관계에 있어 우정의 여백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4

카메라 또한 일종의 거울이다. 한때 은유적인 표현으로 들렸던 이 진술은 오늘날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고쳐 말하면, 마침내 카메라는 거울이 되었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에 내장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시에 촬영도 할 수 있는 카메라를 떠올려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기록장치(필름, 자기테이프, 메모리카드 등)를 통해, 원래는 거울 속에 떠오르는 비실체적 발생에 지나지 않았던 이미지를 실체로 고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거울이 아니기도 하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망원경, 현미경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 같은 광학장치의 경우, 관찰자는 이 장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은 바라볼 수 없었다. 여기에는 안과 밖, 어둠과 빛, 주체와 세계의 엄격한 분리가 있을 뿐이며, 세계의 모든 대상들은 주체를 향해 오고 결국 주체에 흡수된다. 사실 애초부터 이 광학장치들은 관찰자가 그것들로 스스로를 바라볼 것을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에 이미지의 기록이 가능한 카메라가 처음 고안된 이후 꽤 오랫동안, 이미지를 통해 관찰자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이의 손에 카메라를 내맡겨야 했고, 촬영으로 얻은 이미지를 실제로 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지와 주체 사이의 간극은 장치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으로 인해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었고, 카메라와 관련하여 이 간극이 지나치게 좁혀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마이클 파웰의 <피핑 톰 Peeping Tom>(1960)과 캐슬린 비글로의 <스트레인지 데이즈 Strange Days>(1995)는 주체가 카메라 앞에 놓이는 것, 주체가 이미지로 기록되는 것 그리고 주체가 그 이미지를 보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의 공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상황은 이제 우리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미지를 기록하고 실체로 고정시키는 거울 아닌 거울로서의 카메라는, 본디 쉼 없는 발생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우정을 표식가능한(markable) 것으로 전환시키려 드는 - 페이스북의 친구 맺기 기능처럼 - 우리 시대 우정의 경제학에 걸맞은 은유가 되었다.      


5

우정이 표명되기 위해서는, ‘나는 너의 친구이다.’라는 문장이 반드시 두 번 발화되어야 한다. 한 번은 나의 입을 통해, 다른 한 번은 너의 입을 통해. 그런데 이러한 표명은 교환에 의거한 것이기에, 결국 조직 구성원 간의 허망한 다짐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우정은, ‘나의 너의 친구이다.’라는 문장이 나와 너의 내면에서 동시에 울려 퍼질 때, 그 문장이 교환이 아닌 나눔으로부터 나올 때, 그 문장의 울림이 나와 너를 동시에 너와 나의 이미지로 변화시킬 때, 오직 그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우정의 이미지란 시각적이기 이전에 청각적(울림)이고 촉각적(변신)인 이미지다. 우정은 표명이 아니라 경험에 속한다. 


6



거울 아닌 거울로서의 카메라는 또 다른 거울, 즉 스크린을 폐지한다. 카메라가 내장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에서 뷰파인더(viewfinder)와 디스플레이 장치(display device)의 결합을 떠올려 보라. 스크린의 소멸은 곧 영화적 이미지의 기체(基體)가 사라짐을 뜻한다. 뤽 물레의 <알카자르 극장의 좌석 Les sièges de l'Alcazar>(1989)에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두 존재가 우정과 적대의 양극에서 격렬히 진동하는 순간이 담겨 있다(사진). 때는 1950년대, 사진 왼쪽의 남자는 『카이에 뒤 시네마』지(紙)의 기자로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코타파비 영화에 푹 빠져 있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경쟁지인 『포지티프』의 여기자가 알카자르 극장에 나타난다. 코타파비를 재평가하는 글을 준비 중이던 그는 혹시라도 그녀에게 작업의 선수를 빼앗길까 걱정한 나머지, 짐짓 영화에 심드렁한 척 하거나 영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등 온갖 졸렬한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묘하게 끌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7

이미지가 없는 곳에는 우정도 적대도 없다. 이미지는 우정과 적대 모두의 코라(chora), 즉 가능성의 조건이다. 따라서 우정의 이미지란 내기에 걸린 이미지다. 우정 없는 삶은 고독하고 적대 없는 삶은 공허하다. 하지만 이미지 없는 삶은 삶이라 불릴 수조차 없다.


***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특집을 위해, 나는 여섯 명의 영화감독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1) 자신의 영화나 다른 이의 영화에서, 혹은 영화가 아닌 사진이나 그림 가운데서, 우정의 관념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되는 이미지를 하나 고를 것. (2) 그 이미지를 고른 이유를 밝힐 것. 이에 다섯 명의 영화감독(페드로 코스타, 드니 코테, 게이브 클링거, 마티아스 피녜이로, 장건재)이 답신을 보내 왔다. (그들 각각이 고른 이미지와 그에 대한 코멘트는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에 실려 있다.) 



   


<마스터>(2012)에 관한 노트


(내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 The Master>를 보고 놀랐던 것은, 감독이 편의에 따라 간헐적으로 서사를 '방기'하고 있는 것을 - 실은 그도 해법을 찾지 못해 잔꾀를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도 - 적잖은 비평가들이 저항 없이 수긍한다는 점이었다. 야심만만한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마스터>는 구축, 해체, 대안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눈속임을 택한 영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 <마스터>를 보는 내내 머리에 떠오른 영화 가운데 하나 - 의 마지막 쇼트만큼이나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의문들을 틈나는 대로 여기 정리해 보려 한다.)


1

내가 <마스터>를 처음 본 것은 지난 8월 3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다. 65mm 필름으로 촬영되어 굉장한 시각적 경험을 안겨주는 작품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씨네큐브 상영관(2관)의 영사장비와 스크린은 그런 경험을 선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

나는 <마스터>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야심과 재능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덴 이견이 없지만, 이 영화에 대한 많은 평자들의 열광에 대해서는 조금 미심쩍게 생각하는 편이다. 시각적인 것이 서사적 논리에 앞서고 대담하게 생략적이며 ‘의도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게 설계된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감각이나 불가해함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 건 아마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스터>는 감각으로 서사를 해체하면서 불가사의로 ‘향하는’ 영화가 아니라 - 이건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와 <황금시대>(1930),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1961) 혹은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와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영화다. -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처럼 서사의 직조에 불가결한 여러 조작들(발췌, 축소, 압축, 생략, 전위 등)을 아예 전면화함으로써 불가사의에 ‘통로를 열어주는’ 영화라는 점이다. 전자의 영화에선 무엇보다 감각이 문제인 반면, 후자의 영화에선 서사적 ‘조작들을 (재)조작’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런데 <마스터>의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응당 (재)조작이 수행되어야 할 곳에서조차 감각을 내세우려 든다. 


3

조너선 로젠봄의 <마스터>에 대한 비판은 짧긴 하지만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 하는데, 몇몇 이들이 오해하고 있듯 로젠봄은 단순히 이 영화의 “일관성” 부재를 꼬집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마스터>의 폴 토마스 앤더슨과 <리바이어던 Leviathan>(2012)의 루시언 캐스텡-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에 대해, “그들이 제공하는 경험에 걸맞은 일관된 스토리를 들려주고 일관된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는, 내가 보기엔 확실치 않아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리바이어던>에 대해서는 로젠봄과 생각을 좀 달리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글에서 밝히는 것이 좋겠다.) 즉, 그저 “일관된 스토리”(coherent story) 혹은 “일관된 맥락”(coherent context)이 아니라 이 감독들이 제공하는 “경험에 걸맞은”(for the experiences) 일관된 스토리와 맥락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관성이 반드시 고전적 서사와만 결부될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시민 케인>이 (이제는 ‘고전적’으로 비칠 만큼) 일관된 스토리와 맥락을 갖고 있는 만큼이나 부뉴엘, 레네, 린치의 아방가드르적 작품들에도 그들이 제공하는 영화적 경험에 걸맞은 일관된 스토리와 맥락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일관성을 지닌 어떠한 통일된 형식보다 감각을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이는”(로젠봄) <마스터>는 정작 그러한 감각(적 경험)에 걸맞은 스토리나 맥락을 (실험적인 수준에서도) 구성해 내지 못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