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9

노동의 시간, 예술의 시간: 배윤호의 <서울역>


노동의 시간, 예술의 시간
: 배윤호의 <서울역>(2013, 84min)


2011년 8월, 옛 모습으로 '복원'된 서울역 역사에는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COUNTDOWN'이라는 제목의 개관 전시가 열렸었다. 하지만 이 개관전과 연계되어 제작된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당시 전시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시될 수 없었다. 그 작품은 이 전시를, 그것의 비천함을 지켜본 이후에라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배윤호 감독의 84분짜리 에세이 <서울역>이 이제야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얼마 전 <인문예술잡지 F> 제8호(2013년 1월호)에는 <서울역>의 스틸사진들을 소재로 한 배윤호 감독의 포토에세이가 게재된 바 있다.) 제목 그대로 이 에세이적 다큐멘터리는 서울역(의 복원과정)에 관한 것이지만, 제목이 지시하는 서울역은 이제 더 이상 서울역이 아니다. (지금의 서울역은 저 서울역의 곁에 서 있다.) 두 개의 지시대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서울역'이라는 고유명, 그 고유명의 혼란.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역>은 분명 서울역의 '복원'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영화이지만 여기서의 '복원'이란 이미 3중의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1) 이 다큐멘터리는 구 서울역 역사가 문화역 서울 284로 '복원'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공간이 복원되면서 이름은 박탈되었다.) 흥미로운 건, 이런 식의 '복원'과정을 담은 영화에서 흔히 기대할 법한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 사이의 대비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에서 제시되는 몇 장의 흑백사진으로 그치고 만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복원'도 결코 과거를 현전시킬 수 없다는 데서 나오는 추억과 멜랑콜리로부터 간단히 빠져나온다.

 (2) 대신 정말 '복원'이라고 하는 과정이 진행되는 현재에 천착한다. 무엇보다 서울역 복원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모습에 천착한다. 그들이 작업하고, 잡담을 나누고,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모습. 그런데 이 노동과 휴식의 시간은 사실 정작 복원공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잊혀질 시간이다. 망각이 예정되어 있는 이 시간을 기어이 지켜보게 하는 것 이외에 <서울역>은 어떤 다른 목적도 두고 있지 않은 영화처럼 보일 정도다. 서울역의 실패한 '복원'에 대해 우리는 <서울역>이 '복원'하고 있는 이 무의미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시간의 절대적인 힘을 맞세울 수 있게 된다. 

(3) 그런가 하면 <서울역>은 서울역 '복원' 과정을 하나의 전시('COUNTDOWN')가 준비되는 과정으로 보게끔 만는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경구처럼 보여주(고 들려주)되 어떤 것도 입증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가, 불현듯 동시대의 담론적/비평적 미술과 퍼포먼스에 대해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때 감독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지만, 대신 몽타주를 통해 말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서울역 복원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들이야말로 'COUNTDOWN' 전시를 가능케 한 설치미술가 혹은 퍼포먼스의 공연자처럼 여겨지는 반면, 정작 전시에 실제로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공연은 그 노동자들의 작업의 조악하고 비천한 모방처럼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정작 전시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후라고 하는 유리한 지점(vantage point)에서 그걸 비평하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서울역>의 작가를 비난해야 할까? (실제로 <서울역>은 서울역의 복원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만큼이나 예술제도(좁게는 하나의 미술제도로서의 전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서울역>은 지아 장커의 <무용>(2007)처럼 노동의 시간과 예술의 시간이 뒤얽힌 나선을 따라 미끄러지는 영화다. 



아직은 이 영화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다만 최근의 몇몇 한국 다큐멘터리들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말은 덧붙일 수 있겠다. 배윤호의 <서울역>은 이강현의 <보라>(2010)의 의미화되지 않는 시간의 즉물성과 김경만의 <미국의 바람과 불>(2011)(에서 파운드푸티지를 활용하지 않고 직접 촬영한 영상들)의 '한국적' 이벤트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동시에 느껴지는 영화라고 말이다. 

* 배윤호 감독의 <서울역>은 2013년 2월 23일(토) 오후 2시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인문예술잡지 F>독자들을 대상으로 첫 공개될 예정이며, 상영이 끝난 후 대담이 마련되어 있다. 상영회 참석을 원하는 이들은 이곳을 참조. 대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녹취, 정리해 이 포스트 아래에 붙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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