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30

장마


1. Numéro Zéro,  Degré Zéro (2012.6.30)


<0번 Numéro zéro> (장 외스타슈, 1971)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역시!"와 "설마..."가 그것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외스타슈의 경우에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두 반응 모두를 취하게끔 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그에게는 복잡한 구석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그의 복잡함을 '옹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옹호'가 필요한 대상은 누구나 좋아하는 대상은 결코 아니지만 평가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작가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옹호'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그는 한때 정신적 동지라고 생각했던 트뤼포나 샤브롤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을 쏟아 부었다. 즉 그의 공격은 주위의 온갖 것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 외스타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비타협과 비전향의 중요성이다. 그밖의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은, 적어도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 영화가 죽으면 영화를 통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 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 그는 영화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의 작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작가'이다. <엄마와 창녀> (1973)같은 영화는 죽음과 이웃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삶을 희구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영화다. 시나리오에 쓰여진 모든 것은 삶을 그려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에 단 한 부분이라도 생략되어선 안된다. 여기서 비타협과 비전향의 정신이 관철된다. 한편 여기서의 '삶'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이의 삶을 배제하는 삶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 공존하기 위한 사고로서의 삶이다. 이것이야말로 <엄마와 창녀>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라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아오야마 신지, <비타협, 비전향: 장 외스타슈>


2. 프랑수아즈 도를레악  (2012.6.30)

Françoise Dorléac (1942~1967) 

내일(7월 1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부드러운 살결 La peau douce>(1964) 상영 후 강연을 할 예정이다.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물론 트뤼포의 초기작품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 영화가 매우 각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보다 프랑수아즈 도를레악의 존재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6월 26일)은 그녀가 불의의 차사고로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날이다. 그녀의 동생인 카트린 드뇌브와 함께 출연한 자크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1967)은 그녀 생전에 개봉된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 


3. 페드로 코스타의 신작  <스위트 엑소시스트>(2012)

페드로 코스타의 신작 <스위트 엑소시스트 Sweet Exorcist>가 오늘 9월(아마도 베니스영화제?)에 첫 공개된다는 소식이다. 메일과 함께 작품스틸사진 한 장과 간략한 시놉시스가 첨부되어 왔다. 장편은 아니고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빅토르 에리세,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함께 하는 옴니버스 영화 <히스토리즈 Histories>에 포함될 단편이다. 시놉시스 : "1974년 4월 25일 새벽. 젊은 장교들이 거리에서 혁명을 주도하는 동안, 폰타이냐스의 사람들은 숲에서 길을 잃은 벤투라를 찾아 다닌다. 별안간, 강철 두건을 쓴 사나이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와 그를 납치하는데..." (1974년 4월 25일은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혁명이 일어난 날이다.)


<스위트 엑소시스트 Sweet Exorcist>(페드로 코스타, 2012)


2012-06-04

여름이 다가올 때


1.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6.4)


지난 주 서점에 들렀다 아즈마 히로키의 신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이 나온 걸 알고 구입했다. 이미 번역되어 나온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속편 격인 책이라 - 일본어판 제목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로 되어 있다 - 관심을 갖고 읽었는데, 확실히 전작보다 더 구체적이고 과감하며 야심적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인 탓인지 이론적인 섬세함은 다소 기대에 못미친다.) 이 책의 바탕이 된 아즈마의 논문 "메타리얼픽션의 탄생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 - 잡지 <파우스트> 한국판(학산문화사)에 연재되었다 - 를 이미 읽어 보았던 터라, 논의의 많은 부분이 이미 익숙한 것이기는 했다. 아즈마의 논의에서, 라이트노벨이나 마이조 오타로의 포스트모던적 소설들에 관한 것은 이 쪽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교양계층'의 독자들도 어느 정도 그의 설명에 힘입어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지만 - 게다가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들은 꼭 아즈마 식의 '구원비평'이 아니더라도 다카하시 겐이치로 같은 이들의 소설에 익숙한 이들에겐 얼마든지 환대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 정작 이런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미소녀게임 - 한국에서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 혹은 줄여서 '미연시'라고 불리는 - 에 관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내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아즈마의 신간을 다 읽고 나서 미소녀게임 하나를 다운받아 직접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쪽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미소녀게임의 초창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리프(Leaf)사에서 출시된) <키즈아토>를 골라, 시행착오를 거쳐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공략집'대로 게임을 실행해 보았다. 설치 및 게임방법 숙지에 걸린 시간을 제하고라도 '올클리어'하기까지 무려 10시간이 넘게 걸린데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포르노그래픽한 이미지(와 그에 덧붙여진 장황하게 성행위를 묘사한 텍스트들)에 기가 질리긴 했지만, 아즈마의 주목을 끈 미소녀 게임의 구조적인 특징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즈마가 상찬을 아끼지 않은 몇몇 다른 미소녀게임에 도전하는 일은 여전히 좀 망설여진다.) 이 '소설적인 게임'들의 구조적인 특징들은 '게임적인 소설' - 곧 영화화된다고 하는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올 유 니드 이즈 킬 All You Need Is Kill> - 은 물론이고 루이스 부뉴엘(의 후기작), 홍상수(의 최근작), 알랭 레네의 <스모킹/노 스모킹> 같은 영화들과도 쉽게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즈마 자신조차도 이 미소녀게임들이 구조적 아이디어를 육화하는 문제, 전통적 비평의 틀을 빌려 말하자면 '문체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 라이트노벨보다도 훨씬 더 -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아즈마로 하여금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다 모험적으로 - 짐짓 분석적인 외양을 취한 예언으로 - 밀고 나가게끔 자극하는 한편 끊임없이 그 모험에 위협을 가하는 숨은 불안이 되었던 것 같다.  

2. 케빈 B. 리의 비디오 에세이 시리즈
/ 조너선 로젠봄과 <사탄탱고> (5.26)


케빈 B. 리(Kevin B. Lee)를 알게 된 것은 작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다. 리닝(Li Ning)의 다큐멘터리 <테이프 Tape>(2010) -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 를 보고 난 다음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가 나와 마음이 맞는 영화평론가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후 친구가 된 우리는 5월에 전주에서, 그리고 9월에 토론토에서 다시 만났다. 토론토영화제 기간에 한 자그마한 클럽에서 열린 (로테르담영화제가 마련한) 파티에서 만난 케빈과 나는 계간 <시네아스트 Cineaste>의 리처드 포튼과 오늘날 영화비평의 변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오늘날의 영화비평이 문자의 제약을 벗어나 영화이미지와 사운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말(음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방식, 즉 '포스트-프로덕션으로서의 영화비평' - 간단하게는 DVD 코멘터리나 부가영상에서부터 장-뤽 고다르, 하룬 파로키, 톰 앤더슨, 피터 폰 바흐 등의 고도로 비평적이고 예술적인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 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때 케빈은 자신이 지금 구상하고 있는 비디오 작업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어제 알게 되었는데, 그는 올해 8월 발표될 <사이트 & 사운드> 세계영화 베스트 투표에 맞춰, 이 투표에 참여한 세계각국의 저명한 평론가들의 코멘트를 담은 일련의 비디오 에세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인디와이어 Indiewire>지의 프레스 플레이(Press Play) 비디오블로그 - 케빈 자신이 편집책임을 맡고 있는 곳이다 - 를 통해 지난 주에 공개된 오프닝 성격의 첫 번째 비디오는 로저 에버트에 대한 케빈의 트리뷰트였고, 이번 주부터 앞으로 매주 한 편씩 공개될 비디오에선 각 평론가들이 직접 출연해 자신들이 베스트로 꼽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케빈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로 꼽곤 하는) 조너선 로젠봄(Jonathan Rosenbaum)으로 그는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에 대해 말한다. (카메라에 내장된 마이크를 사용해 녹음한 탓에 사운드가 매우 거칠다.) 이 비디오 에세이 시리즈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된다.

Jonathan Rosenbaum on Satantango (1994)

3. 세계영화 베스트 10
/ 미조구치 겐지의 <잔국물어 (시든 국화 이야기)> (5.24)


지난 4월 21일 영국영화잡지 <사이트 & 사운드 Sight & Sound> 편집장 닉 제임스(Nick James)로부터 이 잡지가 1952년 이후 매 10년마다 발표해 온 '세계영화 베스트 10' 선정을 위한 투표에 참여해 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이 끝난 다음 날,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 리스트에 올릴 영화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10편을 골라내는 게 문제였다 - 결국 5월 5일(토)에 10편의 영화리스트를 첨부한 답신을 보냈다. 사실 <사이트 & 사운드>의 공식발표(2012년 8월)가 있기 전까진 이 리스트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미 적지 않은 평자들이 개인 웹사이트나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들의 리스트를 공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래는 내가 보낸 베스트 10 리스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이트 & 사운드> 측에선 각 평론가들에게 가능하면 영화별로 순위를 매겨 줄 것을 요청하긴 하지만 사실 순위 자체는 집계시 큰 의미가 없다. <사이트 & 사운드>는 각 평론가들의 리스트 내 10편의 영화 각각에 모두 1점 씩을 준 뒤 최종합산 결과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영화부터 차례로 순위를 매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10편의 영화를 발표연도 순으로 나열했으며 따로 순위는 매기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이 리스트의 첫머리에 올릴 영화를 골라야 했다면, 아마도 <게르트루드>와 <잔국물어>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우연히도, 내가 꼽은 열 편의 영화 가운데 2편이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되었다.)

흩어진 꽃잎 Broken Blossoms (D.W. 그리피스 / 1919년)
마부제 박사의 유언 The Testament of Dr. Mabuse (프리츠 랑 / 1933년)
놀라운 진실 The Awful Truth (레오 맥커리 / 1937년)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 Lincoln (존 포드 / 1939년)
잔국물어 (시든 국화 이야기) The Story of the Late Chrysanthemums (미조구치 겐지 / 1939년)
The River (장 르누아르 / 1951년)
인디아 India : Matri Bhumi (로베르토 로셀리니 / 1959년)
게르트루드 Gertrud (칼 드레이어 / 1964년)
티타시라 불리는 강 A River Called Titas (리트윅 가탁 / 1973년)
반다의 방 In Vanda's Room (페드로 코스타 / 2000년)

그러고 보니, 나는 지난 10년 간 이런저런 글을 써 왔지만 위의 영화들에 대해서 따로 논한 글이 거의 없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7년 전, 미조구치의 <잔국물어>에 관한 짧은 리뷰를 썼던 기억이 떠올라 여기 전문을 옮겨 둔다. 물론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이 치기어린 리뷰엔 못마땅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 가령, 나는 <적선지대>에 대해 "불확실하고 모호한 실험"이라고 단정내렸던 걸 후회한다 - 미조구치의 영화가 비인간적인 우주 안에 놓여진 비인간적인 여성들을 응시하는 데서 생성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파토스를 영화적 힘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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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일본군국주의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던 가운데, 미조구치 겐지는 당대의 민감한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해 이른바 '예도물'(藝道物)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잔국물어>는 그 가운데 발표 시기에 있어서나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나 첫머리에 놓이는 작품이다. 도쿄 가부키 명문가의 양자이지만 예술적 재능의 부족으로 고심하던 기쿠는 어느 날 집안의 하녀 오토쿠의 솔직한 충고를 듣게 된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그는 급기야 그녀와 함께 오사카로 도피하기에 이른다. 이후 기쿠는 유랑가부키극단의 배우로까지 전락하지만 오토쿠의 헌신적인 희생에 힘입어 마침내 예술가로 대성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오토쿠는 그만 병상에서 죽고 만다. 거의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집요한 롱테이크, 인물들의 행위를 멀찍이서 응시하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롱숏, 가혹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힘, 가부장적 사회제도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인의 삶과 예술적 완성을 위해 고민하는 예인(藝人)의 삶의 교차, 이러한 것들은 흔히 '미조구치적인 것'이라 일컬어지는 한 특별하고 견고한 소우주의 질서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로 간주되며, 그런 만큼 <잔국물어>라는 걸출한 작품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빠짐없이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잔국물어>가 미조구치의 작품들 가운데서 특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앞서 언급한 '미조구치적 우주', 무엇보다 <서학일대녀>나 <산쇼다유> 등의 시대극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뚜렷이 각인된 그 매혹적이고 잔인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제시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잔국물어>는 미조구치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일종의 '메타-영화'에 속하는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조구치가 이후에 내놓은 작품들은 여러 형태로 조건을 바꾸어가며 여기서 발견한 법칙을 적용해본 사례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조구치는 적어도 영화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혹은 그 시대의 여성들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불편함은 작품에 내적긴장을 부여하면서 성공적인 결과(<오사카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를 가져오기도 했고 때로는 미조구치 자신을 불확실하고 모호한 실험(<적선지대>)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특히 당대 여성들의 욕망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그가 그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었다고 말하기는 사실 좀 힘들다(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조구치의 영화들이 가지는 수많은 한계들을 떠올려 보라). 대신 그는 시선을 과거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우주에 부합하는 여성적 위치를 보다 뚜렷이 드러내고 시대물이라는 안전한 외양을 빌려 스스로의 불편함을 감출 수 있었다. 이때 여성은 남성의 죄의식의 잔여이거나, (흔히들 떠올리듯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이 외화(外化)된 비인간적인 대상의 역할을 떠맡는다. 여기서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그녀들이 잔인하거나 냉정하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적인 희로애락과 동떨어져 있는 듯 초월적으로 혹은 사물적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미조구치적 우주' 자체의 비인간성이다. 이곳은 모든 인간사에 무심한 세계이며, 영원히 침묵하고 있는 무한한 공간(파스칼)이고, "우리의 죄의식을 저장하는 금고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중단한"(옥타비오 파스) 냉담한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미조구치의 비인간적인 여성들이 그 비인간적인 우주 안에 놓여질 때 지극히 인간적인 파토스가 생성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미조구치의 영화들이 간직하고 있는 강렬한 잔혹성의 비밀이 숨어 있다. 때로 그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부드러운 잔혹성을 능가한다. 그것은 단지 여성의 희생이라고 하는 멜로드라마적 장치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잔국물어>는 이와 같은 잔혹성의 체험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작품이다. (2005년 4월)

4.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재 Ashes>(2012)와 로모키노 카메라 
/ 존 토레스의 <뮤즈 Muse>(2011)와 하리네즈미 카메라 (5.22)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20분짜리 신작 단편 <재 Ashes>(2012)가 지난 19일(토)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데 이어, 온라인 영화사이트인 MUBI(http://mubi.com/films/ashes)에서 무료로 서비스되고 있다. <재>는 로모그래피(Lomography)사와 MUBI가 공동으로 디자인한 초소형 35mm 카메라인 "Lomokino MUBI Edition"(아래 사진)으로 촬영된 단편이다.


이 로모키노 카메라는 일반적인 영화촬영용이 아니라 통상 스틸사진용으로 쓰이는 35mm 네거티브필름 - 편의점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 이나 슬라이드필름(포지티브필름)을 넣어 동영상 제작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것으로 한화 15만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구입시 아피찻퐁 <재>의 필름푸티지와 MUBI 1달 무료이용권이 패키지로 제공된다.) 매 프레임 기록시 일반적인 35mm 카메라보다 필름소모면적이 1/3~1/4 정도에 지나지 않고 초당 3~5 프레임으로 기록된다. (이는, 36EXP(36장) 짜리 35mm 필름을 사용할 경우 대략 144프레임/36초의 영상기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한 로모키노로 촬영된 영상의 종횡비는 3:1 때로는 그 이상이 되며, 화면은 연속적이지 않고 주기적으로 끊어지며 툭툭 튀는 느낌을 주게 된다.) 

어제 영상원  수업시간에 로모키노로 촬영된 아피찻퐁의 <재>를 학생들과 함께 보았는데, 시각적으로는 우선 스탠 브래키지나 조나스 메카스의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떠올리게 했다. 한편으론 매우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작품이기도 한데, 몇몇 감상평들을 보니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를 떠올리는 이들도 제법 있는 듯 하다. 


Ashes (Apichatpong Weerasethakul / 2012 / 20min)

집에 돌아와 <재>를 다시 보고 로모키노 카메라에 대해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노라니, 문득 작년 초에 보았던 존 토레스의 초단편 <뮤즈>가 떠오른다. 이 '씨네포엠'은 존 토레스가 일본 방문시 구입한 디지털 토이카메라 'Harinezumi 2'를 가지고 찍은 것이다. 'Harinezumi 2'는 8mm 필름 느낌이 나는 동영상 촬영이 가능하며 사운드 동시녹음도 가능하다. (스마트폰용 8mm Vintage App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Muse (John Torres / 2011 / 1'39")


5. 존 카사베츠의 <남편들 Husbands>(1970)을 본 다음 날 (5.10)


어제, 부산 동서대학교의 임권택영화예술대학에서 영화제 관련한 특강을 하고 돌아왔다. 강의 전에 조교 분께서 학생들이 내게 묻고 싶은 질문들을 미리 받아 보내주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가운데는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뻔한 질문이다. 만일 어떤 기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더라면 나는 그냥 "영화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가져오려 노력합니다"라는 식의 뻔한 답변을 심드렁하게 내뱉었을 것이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학생들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강의 당시 내 답변은 대략 이러했다. (혹은 이렇게 답변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리했는지는 녹취록을 확인하기 전까진 알 길이 없다.) "영화가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 아닌지를 먼저 고려하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 싶어하고 그 변화의 과정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길 자세가 되어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은 영화들을 선호합니다. 반면 자신이 만든 영화를 통해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영화들은 보기 불편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가운데 전자의 태도가 가장 강렬히 느껴진 영화의 사례로 공살루 토샤의 <이곳은 달이 아닌 지구 It's The Earth Not The Moon>(2011)를 언급했다. (사실 이 영화는 올해 <디지털삼인삼색> 참여감독 가운데 하나인 라야 마틴이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한국에 소개된 바는 없지만, 마틴의 장편데뷔작 <세상 끝의 섬 The Island at the End of the World>(2004)이 소재나 접근방식에서 토샤의 다큐멘터리와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이 문득 떠오른다. 또한 영화 속 인물이 그 주변의 인물 및 상황과 관계맺으며 성장하는 과정에 따라 영화 자체도 -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 성장하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성장영화'라는 점에서, <이곳은 달이 아닌 지구>는 마틴의 <상영 중 Now Showing>(2008)과도 관련될 수 있다.) 강의 시간에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올해 전주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한 장건재 감독의 <잠 못 드는 밤> 역시 그런 영화 가운데 하나다. 한편 후자의 사례로 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과 얼마 전 타계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 같은 작품을 예로 들었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빠뜨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대략 이런 것 아니었을까? 전자의 영화들은 어떤 식으로건 보는 이들에게 그 태도를 전염시킨다.  딱히 보는 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각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건 우리를 삶으로 돌려보냄으로써, 그와 같은 삶으로의 회귀를 가능케 하는 영화의 힘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 후자의 영화들은 보는 이들을 변화시키고야 말겠다는 야심찬 의지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숭배 이상의 결과를 낳지 못한다. 한 가지 더, 한 연출자가 변화의 과정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은 사실 붕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영화 자체를 변화에 내맡긴다는 - 혹은 우연적인 것의 개입을 용인한다는 -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 카사베츠의 <남편들>과 필립 가렐의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 같은 영화들을 오랜 만에 다시 보면서 새삼 재확인한 생각들, 혹은 초현실주의의, 일견 미약해 보이지만 여전히 강렬한, 매혹적인 유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