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15

겨울의 시작


1.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11.15)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의 영화라며 극찬하는 이도 보았고 맬릭의 가장 실망스러운 영화라며 비난하는 이도 보았다. 맬릭의 전작 <신세계 The New World>(2005)를 보았을 때, 그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트리 오브 라이프>에 대한 어떤 비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결국 대부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을 확신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마침내 맬릭의 이 끔찍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우선 한국평론가들이 쓴 리뷰들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대체로 좋은 평을 받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든가 혹은 "이런 점들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러저러한 점에서 실패작"이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거만하고 점잔빼는 문장으로 길게 늘여놓은 글들뿐이었다. 비판하는 글들조차 어찌나 정중한지 비판자들 자신이 맬릭의 허세에 저도 모르게 감염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달까. (나는 이런 영화엔 예의를 갖춰 비판할 필요가 없고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하면 그만이라고 본다. 아예 아무런 글을 쓰지 않고 침묵하던지 그게 아니라면 100년이 넘는 영화사(史)를 모독하며 21세기의 영화를 오도하려 드는 이 영화를 아주 부숴놓겠다는 결의로 달려든던지.)

영화적인 것이란 결국 물성(物性)과 감각이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물성을 통해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건 심지어 영화에서 유령적, 신비적, 환영적인 것을 다룰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며,환상성의 물성화를 통해 감각의 열림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들로는 <노스페라투 Nosferatu>(1922)와 <타부 Tabu : A Story of the South Seas>(1931)의 F.W.무르나우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I Walked wih a Zombie>(1943)의 자크 트루뇌르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영화감독들은 감각이 물성 앞에서 마침내 열리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에 기대기보다는 물성 자체를 감각화함으로써 성급히 관객을 홀리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주적인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우주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트리 오브 라이프> 초반부를 장식하는, 베르너 헤어조크 혹은 갓프리 레지오 풍의 그 '우주적' 시퀀스만으로도 이 영화는 올해의 가장 저주받을 영화가 되어 마땅하다. 문득 <용암의 집>에서 페드로 코스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영화 도입부에 용암을 보여준 데 있다고 한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말이 떠오른다.) 생명의 나무를 환기시키기 위해 굳이 앙각으로 촬영된 아름드리 나무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 (나는 예전에 <씬 레드 라인>과 <신세계>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 쓰면서 "식물성의 침묵"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트리 오브 라이프>는 오히려 식물성의 광란으로 넘쳐난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적인 것에 대비되는 개인적인 것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굳이 1950년대를 살아가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 그저 그것이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의를 지니는 것(사물, 사태, 사건, 인물 등)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의 물성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영화적인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전무한 <트리 오브 라이프>는 도무지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나아가 영화의 모든 쇼트가 무가치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영화다. 따라서 우주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라는 대당을 적절히 - 변증법적으로(?) - 관계맺는 데 실패한 영화라든가 유기적이지 못하다든가 하는 지적은, <트리 오브 라이프>가 서로 긴밀히 연관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의의있는 개별적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인 양 암시하는 비평적 언급들이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트리 오브 라이프>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 A Space Odyssey>(1968)가 저지른 죄악을 그보다 과대망상증적인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다. 생명을 이야기하는 죽음의 영화.) 그건 <트리 오브 라이프>가 풍부한 술어적 잠재성을 품은 고유명사적 존재(이 나뭇잎, 이 나무, 이 강아지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나)들의 구체성을 박탈 - 여기서 브래드 피트는 그저 1950년대 '어떤' 미국가정의 '어떤' 가장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  하고 모든 존재들을 진부한 은유의 보조관념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구체적인 물성을 요하지 않는 감각적 형용사들과 동사들만 난무하는 역겨운 스펙터클의 영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보자면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모든 것은 a(존재)로서도, a에서 a',a'',a'''.../b,d,e...로 향하는 것(생성/변화)으로서도 호명되지 않으며 오직 'A적(的)인 것'을 가리키기 위한 희미한 이름 (a)로서만 불려나올 뿐이다.  (이때 감각은 열리기를 중단하고 잠에 빠져들거나 기껏해야 마비될 뿐이다.) 그러니 <트리 오브 라이프>의 모든 쇼트들이 어디에 시선을 둘 지 몰라 흔들리며, 머뭇거리다 재빨리 사라지고, 구원을 간청하듯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잃은 쇼트들의 당황과 망설임. 


2. 데이브 커의 <영화가 중요했던 때> (11.19)

지난 9월 토론토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영화평론가 데이브 커(Dave Kehr)의 평론집 <영화가 중요했던 때 When Movies Mattered>가 올해 출간된 것을 알고 구입해 두었다가, 최근 짬이 나는 대로 틈틈히 읽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평론집은 그의 최근 글들이 아니라 그가 <시카고 리더 Chicago Reader>의 평론가이던 시절, 그러니까 그의 나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이었을 때 - 정확히는 1974년부터 1986년 사이, 책의 부제대로라면 영화의 "변형기"(transformative period)에 - 쓴 글들만을 모아 놓은 것이다. 커의 최근 글들은 <뉴욕 타임즈>나 <필름 코멘트> 같은 잡지들, 혹은 그의 블로그에서 종종 접해 왔지만 이처럼 그의 경력 초기의 글들을 접해본 건 처음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가 대단한 통찰로 빛나는 문장들을 발견하고는 깜짝깜짝 놀라는 게 한두번이 아니다.

예컨대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프란시스카 Francisca>를 보고 나서 쓴 글(1983)을 보면 "장-마리 스트라우브가 막스 오퓔스와 협력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올리베이라는 리얼리티를 촬영하지 않지만, 대신 영화에서 가능한  유일한 리얼리티, 즉 리얼리티의 예술적 대체물로서의 재현(representation) 자체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단언하는데, 이는 사실 올리베이라의 많은 영화에 폭넓게 적용되는 비평적 진술이 된다. 그런가 하면 라울 월쉬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쓴 그에 관한 에세이(1981)는 다음과 같은 비장한 문장들로 끝을 맺는다. "[월쉬 회고전은 고사하고] 몇몇 작품들이나마 지역의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법이 거의 없다. 아마도 월쉬의 저주는 그의 다산성(多産性)에 있는 듯하다. 익숙함의 유혹에 이끌려 선택되는 몇 편의 유명한 영화들에서 벗어나, 월쉬가 만든 백 편이 넘는 영화들 가운데서 영화를 골라낼 자는 누구인가?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월쉬의 작품은 들쑥날쑥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모호하건, 거기에 그의 번뜩이는 재능, 보는 이를 감염시키는 그의 영혼이 제대로 담겨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월쉬의 영화를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월쉬를 위한 시네마테크는 심야 텔레비전이다. 그의 영화가 방영되지 않고 한 주가 지나가는 법은 거의 없다. 때로는 한주에 두세편이 방영되기도 한다." 커는 월쉬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스타일과 가치들이 그가 작업한 장르 자체와 워낙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월쉬의 전쟁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모든 전쟁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의 서부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3. 아마도, 우연의 일치 (11.25)

서점에 들렀다가 지난 9월 출간된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지도와 영토 La Carte et Le Territoire>(2010)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구입해 읽는 중인데,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 속 <르몽드> 기자가  주인공의 첫 전시회를 보고 쓴 리뷰의 한 문장인데, 워낙 소설 자체가 반어와 직설이 구분불가능할 만큼 뒤섞인 문장들로 넘쳐나는 만큼, 그처럼 따옴표 사이에 자리한 문장에 작가의 진의가 얼마나 담겨 있는지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다. 여하간 이런 문장이다. "그는 공동창작자로서의 신의 시점을 채택해 인간의 편에서 세상을 (재)구성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문득 이건 우엘벡 자신의 소설에 대한 능청맞은 논평(내지는 옹호의 발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기술한 듯한 스타일 때문에 가끔 잘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이미 우엘벡의 <소립자>(1998)를 읽었을 때부터 이 작가는 기묘하게 스위프트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반면 <트리 오브 라이프>의 테렌스 맬릭은 신의 시점을 채택해 아예 그 절대자의 편에서 자신의 영화적 우주를 (재)구성하려 갖은 애를 썼던 것이고 나는 그런 가당찮은 태도를 견딜 수 없었다. 이 영화의 기도-로서의-내레이션은 발화자의 입장이 아니라 청자의 입장에서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 일단 끝까지 읽고 다시 생각해 볼 참이지만 현재까지 읽은 감상으로는 - 딱 250페이지 읽었다 - 술술 읽히긴 하지만 그의 초기소설보다 서늘한 맛이 덜하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인데, 현대 미술계의 이면에 관한 이야기와 시대상(및 연애담)을 교차시키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혹시 출판사 문학동네에 이런 쪽에 취향이 있는 편집자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유인즉 지난 6월에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판된 마키 사쓰지(쓰지 마사키)의 추리소설 <완전연애>(2008)도 비슷한 설정을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

지난 일요일 광화문의 미로스페이스에 가서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 Drive>(2011)를 보았다. DVD로 상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질이 형편없는 데다 사운드도 엉망이라 환불을 요구하고픈 심정이었다. 지난 9월 토론토영화제에서 볼 때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고, 결국 이튿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다시 관람했다. 이 영화는 올해 한국에 개봉된 영화 가운데 소이 청(정보서 혹은 청 퍼우소이)의 <엑시던트 Accident>(2009)와 더불어 최고의 액션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베넷 밀러의 <머니볼 Moneyball>(2011)과 이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자동차 운전석이야말로 진정 유일하게 사적이고 친숙한 공간인 것처럼 비친다. 두 영화 모두, 운전석에 홀로 앉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 - 강도사건(<드라이브>), 야구경기(<머니볼>) - 의 추이를 긴장된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시작해, 홀로 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그들 위로 노래의 형식을 빌려 그들의 삶의 방식을 위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 "A Real Hero"(<드라이브>) "The Show"(<머니볼>) - 것으로 끝난다. 낭만적 고독과 세속적 도전, 장르와 리얼리즘, 감각적 폭력과 설득/대결의 언어, 화폐의 강탈과 자본의 경영, 이처럼 상이하게 갈라진 두 영화가 결국 만나는 장소. 혹은 자동차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공간 중 하나이자 [...] 인간에게 제공된 마지막 일시적 자치권역 중 하나"(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처럼 보인다.

댓글 2개:

  1. '트리 오브 라이프'에 굉장한 실망을 느낀 관객으로서
    유운성 평론가님의 생각에 공감을 느낍니다.
    특히 큐브릭과의 비교는 적절한 것 같고요.
    그런데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이 한
    죄악에 대해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 큐브릭 감독은 과대평가된 감독이고
    후에는 잊혀져도 괜찮을 감독군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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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 A Space Odyssey>(1968)가 저지른 죄악을 그보다 과대망상증적인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다

    ......라는 부분이 이해가 갈 듯 말 듯 아리송송합니다.
    어떤 죄악이며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과대망상증인 건지
    조금만 더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운성님의 글의 갸우뚱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 부분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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