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8

[Causerie] <정도 正道>가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가 된 사연




최근 한 지인의 부탁으로 르네 비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위 사진)의 판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상황주의 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은 르네 비네가 다른 장편영화 한 편을 통째로 가져와 '전용'(detournement)한 것이다. 우여곡절이 많은 영화인데 영문이나 프랑스어로 된 정보들을 봐도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1970년대에 제작된 한국영화 <정도 正道>가 어떻게 프랑스로 건너가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아래 정리해 보았다.

(1) 원본영화 A (중국어버전)
: 영어제목으로는 "The Crash"라고 알려져 있지만, 중국어 제목은 <당수태권도 唐手跆拳道>이고 1972년 6월 20일 홍콩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두광치(屠光启)라고 되어 있다. 아래 홍콩판 포스터를 보면 포스터(중앙 약간 우측)에 "도연(감독) 두광치"라고 적혀 있다. (중국어로 된 영화정보는  http://bit.ly/2weIGA1 중국어로 된 감독 정보는  http://bit.ly/2x8z1au 를 참고.)



영문위키피디아 등에는 제작사가 Yangtzu Productions라고 되어 있는데 위의 (중국어로 된) 영화정보 링크를 보면 "장강영화(홍콩)유한공사"(长江电影(香港)有限公司)이다. (장강이 곧 양쯔강이니 영문회사명을 저렇게 한 모양이다.) 

(2) 원본영화 B (한국어 버전)
: <당수태권도>는 1970년대에 횡행했던 이른바 한홍합작 영화 가운데 한 편이다. 촬영도 한국에서 이루어졌고 한국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이 작품의 한국어 제목은 <정도 正道>이고 1973년 5월 12일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런데 한국어 광고를 보면 감독이 강유신이라는 이로 되어 있다. 아래는 당시 신문에 실렸던 영화광고다.




위 광고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73년 5월 12일자 일간지들을 검색한 다음에(키워드 검색으로는 잡히지 않는다) 광고란을 보면 이 영화 광고들이 실려 있다. 위의 포스터 가운데 왼쪽 포스터 상단을 보면 " 프랑스 파리에서 상영된 화제의 영화!"라는 문구가 보인다. ​아래는 한국어판 <정도>의 포스터. 상단에 감독 이름이 분명히 보인다.



이 영화의 제작사는  한진흥업이다. 한진흥업은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 제작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중앙일보』 1973년 4월 5일자 기사를 보면, 

제작사「한진흥업」을 고발

문공부는 우리나라를 무대로 우리나라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당수태권도』라는 영화가 최근 「프랑스」「파리」에서 용공 단체의 선전영화로 둔갑, 상영되고 있다는 보도 (3월31일 자 본지 4면게재· 중앙일보 「파리」주재 주섭일특파원보도)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서 이 영화가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 나라 영화 (제목은 『정도』 ) 임을 밝혀내고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이 영화를 작년 말 「홍콩」 장강전영공사에 수출한 제작사 한진흥업(대표 한갑진)을 검찰에 고발했다. 「한진」은 제작에 앞서 「장강」과 7천「달러」에 수출하기로 계약, 동남아지역상영권만 양도하기로 했는데 수출신고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이 「장강」에 「필름」을 반출, 「장강」 은 다시 「토키」를 중국어로 바꿔 임의로 「프랑스」 좌파 단체인 「계급투쟁 촉진회」에 이중 수출 했다는 것이다. (기사 링크:   http://news.joins.com/article/1344888)

이 기사를 보면 <정도> 혹은 <당수태권도>는 홍콩에서 두광치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한국에서 제작해 홍콩에 (합작형식으로 계약해) 수출한 한국영화인 셈이다. (홍콩에서는 중국어로 더빙해 개봉하고 이를 프랑스까지 수출한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정도>의 35mm 프린트는 보유하고 있지 않고 비디오 자료도 없다. 시나리오(오리지널 및 심의대본)만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영상자료원 KMDB <정도> 정보 참조:  http://bit.ly/2v5QAXb) 그런데 2012년 12월 7일자 『동대신문』을 보면, 한진흥업 한갑진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한국영화 필름 127편 및 해당 작품들의 지적 재산권, 대본, 스틸사진, 영화기자재, 비디오테이프, 영화서적 등 관련 저작물 일체를 동국대학교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갑진 한진흥업 회장, 한국영화필름 127편 기증후학들의 연구를 위해 다수의 연구 가치 큰 자료 기부

원로 영화인 한진흥업 한갑진 회장이 지난 5일 우리대학에 소장하고 있던 한국영화 필름 127편 및 해당 작품들의 지적 재산권, 대본, 스틸사진, 영화기자재, 비디오테이프, 영화서적 등 관련 저작물 일체를 기증했다. 한 회장은 “영화예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국대학교가 이 자료들을 잘 보관하고 활용했으면 좋겠다”며 “학생들이 한국영화사를 공부하는데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희옥 총장은 “70년대 영화산업을 이끄셨던 한회장님께서 기증해주신 중요한 영화 사료를 후학들의 연구에 귀중하게 활용하겠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번 기증된 영화자료 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은마는 오지 않는다 △호국 팔만대장경 등으로 보존 가치가 큰 것으로 판단된다. 한갑진 회장은 1966년부터 영화 제작 및 보급을 시작해온 한국 현대영화사의 산증인이다. (기사 링크:  www.dgu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93)

(3) 르네 비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
: <정도> 혹은 <당수태권도>는 원래 컬러영화다. 르네 비네가 1973년에 공개한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는 <당수태권도>의 중국어버전 프린트를 활용해, (a) 중국어 사운드트랙은 그대로 둔 채 (b) (원래 영화와 무관한)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것이다. 이것이 최초 버전인데 이 프린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버전 다음에 나온 것이 프랑스어로 더빙한 버전이고 요즘 보여지는 것도 이 버전이다. 요즘에는 주로 영문자막이 처리된 프랑스어 더빙버전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유튜브( www.youtube.com/watch?v=mjUNY0433Do)나 우부웹( www.ubu.com/film/vienet_dialectics.html)에서 제공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영문자막 처리된 프랑스어 더빙 버전이다. 그런데 이 버전을 보면 흑백으로 되어 있다. 이유인즉, 이 프랑스어 더빙/영어자막/흑백화면 버전은 르네 비네가 <당수태권도>를 '전용'한 것을 다시 '전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버전은 1990년대에 비디오아티스트이자 영화작가인 키스 샌본(Keith Sanborn)이 만든 것이다. 영문자막, 흑백, 그리고 레터박스 처리된 비디오로 제작한 것이고 1990년대에 미국 이곳저곳에서 <변증법은 벽돌을 부술 수 있는가?>가 상영될 때는 주로 비디오로 상영되었다.